夜話(야화) (19) <第二話(제2화)> 榮光(영광)의 敗北(패북) ⑤
발행일1968-07-14 [제626호, 4면]
윤 사장은 앞이 아득하였다. 온 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으려는 것을 간신히 가누고 서 있었다. 그는 매정하게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처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더 따라갈 기력이 없었다.
윤 사장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단정하면서도 마치 먼 나라의 꿈을 바라보듯 그녀의 뒤를 쫓을 수가 없었다.
아니 꿈의 세계처럼 좇고 좇고 아무리 좇아도 서로의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윤 사장은 겨우 기운을 차려서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로 돌아왔다. 돌아온 윤 사장은 그대로 쏘파에 주저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푸르고, 그 푸른 하늘에 박속같이 흰 구름이 군데 군데 걸려 있었다. 바로 눈앞에 뭉툭한 남산이 가로 놓이고 그 산허리로 케이블·카가 천천이 오르내려오고 있었다. 정다운 남산이었다.
비록 평범하고 볼품이 없는 산이로되 한없이 구수한 매력과 인정을 풍기는 산이었다. 그러나 그 산은 변함이 없건만 사람과 시가지는 너무도 많이 변하였다. 이십년이라는 세월이 그렇게도 모든 것을 변화시킨데 대하여 윤 사장은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이라는 것은 모든 것에 변화를 일으키고 그리고는 그것을 옛날로 다시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위처럼 꼼짝할 수없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윤 사장은 시름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애는 정아다. 내가 처음 보았을 때 직감으로 알아챈 바로 그대로다.)
길게 담배연기를 뿜으며 윤 사장은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윤 사장이 명애(明愛)라는 이름과 정아라는 이름을 댔을 때 그 처녀는 확실히 깜짝놀라는 눈치였다. 해외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윤 사장의 눈치로 그것은 분명해 보이었다. 그러나 윤 사장은 그 처녀를 끝까지 따라 가서 정체를 밝힐 용기가 없었다. 그것은 그 처녀에게서 어떤 압력을 느낀 때문이었다. 그 압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마는 윤 사장은 한낱 나이어린 처녀에게 자신이 지닌 인생실력의 절반도 휘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왕 체면 불고하던 판이니 끝까지 따라가서 정체를 알아낼걸 그랬는가?
물론 그랬어야할 일이었다. 한번 기회를 놓쳤으니 그 처녀를 어디서 다시만 날수 있을 것인가. 잘못하면 영구히 다시는 그 처녀를 만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큰 낭패가 안닌가!)
윤 사장은 혀를 찼다. 그러나 아무리 낭패라도 그 처녀를 그 이상 더 따라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 노릇을 장차 어떻게 한다?)
윤 사장에게는 한가지 남은 희망이 있었다. 그것은 간접적으로 그 처녀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윤 사장이 벨을 누르려고 하는데 밖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들어온 사람은 서무과장 이었다.
『마침 잘왔소. 그러지 않아도 지금 서무과장을 부르려던 참이었소.』
『사장님, 운전수 만나지 못하셨읍니까? 저는 수위가 사장어른께서 그대로 나가셨다고 하고, 운전수가 잠시 자리를 떴다가 쩔쩔 매기에 사장님이 혹시 늘 가시던 곳에 가셨는가 하고 운전수를 보냈는데요.』
서무과장은 얼굴에 웃음을 담뿍 담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괜찮소. 나는 오늘 전혀 방향이 다른 데를 잠시 다녀왔소』
『사장님, 어디를 다녀오셨는데요?』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고, 내가 긴하게 서무과장에게 부탁할 말이 있으니 잠간 거기 좀 앉시오』
윤 사장은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예』
서무과장은 엉거주춤하고 앉아서 황송한 듯이 윤 사장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어떤 처녀를 좀 찾아야 하겠는데…』
『예? 처녀요?』
서무과장은 매우 의아스러운 눈치였다.
윤 사장은 독신이지마는 귀국한 이후 지금까지 염문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윤 사장은 옛날 가족을 찾고 있었지파는 그것은 연줄을 통해서 따로 찾고 있었으므로 서무과장과의 관련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까 우리가 회의를 하지 않았소?』
『예 회의를 했읍지오. 그 회의를 끝내자마자 사장님께서 슬그머니 말씀도 없이 밖으로 나가시지 않으셨읍니까?』
『맞았소. 바로 그 때 복도에서 우리회사에 왔다가 돌아가는 한 처녀를 만나서 그 처녀의 뒤를 따라갔던거요.』
『처녀의 뒤를 따라 가셨어요?』
서무과장은 이번에는 놀라서 입을 딱 벌이었다.
『허허허허… 그렇다고 나이 먹은 내가 그 처녀에게 다른 생각이 있어서 따라갔던 것은 아니오.』
『예, 예, 그야 물론 그러시겠지요. 예.』
『그래서 그 처녀를 좀 찾았으면 하는 것이 내 부탁이오.』
서무 과장은 얼떨떨하였다.
『아니 사장님께서 그 처녀를 따라 가셨었다면서요?』
『그런데 도중에 그만 놓쳐버리지 않았겠소. 이름도 주소도 모르는데 놓쳐버렸으니 이거 큰일이오.
그래서 지금 여러가지로 궁리를 하다가 서무과장을 부르려던 차였소.』
『대체 어떻게 생긴 처년데요?』
『나이 스무살 조금 넘은 아주 예쁘게 생긴 처녀인데 머리를 길게 느리고 초록빛 원피스를 입었소.』
『그런 처녀가 우리 회사에 오늘 왔었군요』
『그렇소. 바로 회의를 끝내고 내가 방으로 돌아오려는데 복도로 지나가지 않겠소』
『잘 알겠읍니다』
『어떻게 찾을 도리가 있겠소?』
『그 시간에 누구를 찾아왔는지 찾아온 사람을 알아보면 되겠지요』
『맞았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어떻게 서무과장의 힘을 좀 빌립시다』
윤 사장의 간절한 부탁에 서무과장은 새삼스럽게 또 얼떨떨한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