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길] 롬바르디 講論(강론) 抄(초)
「自由(자유)」「平等(평등)」크리스찬의 要諦(요체)
유럽은 5백년 間(간) 크리스차니즘 파괴에 전력
천주 배반하는 者(자)가 교회 으뜸이었고
◈ 제3회
①우리는 역사상 획기적인 순간에 놓여 있다. 『예수여 나를 완전히 당신께 바치오니 나에게 명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쇄신되어 온 「천주의 백성」의 역사를 예수님을 통해서 보기로 하자.
㉠교회가 온 세계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성신강림 후부터였다. 하여 3세기 동안의 참혹한 박해를 받긴 했지만 중세기 유럽은 온통 크리스챤문화 속에 난숙하였다. 이 시기에는 임금의 교종가 바로 백성의 종교였으며 이후 아프리카로 아시아로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뒤에 인간이 종교를 가지지 않고도 스스로의 이성만으로 완전히 자유를 누리려는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이 온 유럽을 풍미하는 시기가 온다. 5백년이란 짧지 않는 시기를 사람들은 온 유럽에 뿌리박혀 있던 크리스챤문화를 무너뜨리는 데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소위 종교개혁에서 보는바와 같이, 천주를 배반하는 지도자가 교회의 으뜸들이었다는 점이다.
㉢하느님을 공공연하게 공격하는 물질주의 문명이 기세를 올리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이다. 제한 없는 자유주의가 초래하는 무질서에 대신하여 그들은 이제 「신의 죽음」을 부르짖으며 평등을 외쳤던 것이다.
이렇게 대충 훑어보라면 우리는 다시금 천주 섭리의 미묘한 흐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천주님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라도 「자유」와 「평등」이라는, 따지고 보면 가장 크리스찬적인 두개의 낱말을 세상속에 던지길 원하셨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2차 「바티깐」 공의회가 열렸다. 그러므로, 18세기를 「자유」의 시대라고 한다면, 19세기는 「평등」, 20세기는 「공동체」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즉, 20세기에 있는 우리는 과연 우리가 얼마나 진실하게 형제들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지, 얼마나 스스로의 근본적인 쇄신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지를 깊이 자성(自省)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의 미래는 천주의 백성이 얼마나 신중하게 천주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②역대 교황과 공의회는 쇄신하는 교회를 인도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또 미래의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천주는 장상들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삐오 12세는 성경연구를 권장함으로써 교회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주었고, 요안 23세는 일생을 통해 교회의 모습자체를 실천함으로써 이 시대에 있어서 미래교회의 씨앗을 심어 주었다. 그리하여 공의회를 쇄신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꼭 있어야만했던 역사적인 요소의 결과가 되도록 했다. 물론, 대화와 복종에 대한 문제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장상들의 뜻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을 가능한 한 충분히 발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요, 이점에 있어서 교황 바오로 6세는 누구보다 깊은 이해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다른 이들이 자기와 같지 않는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할 뿐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양심이 명하는 바를 말하는 자가 가질 수 있는 확고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공의회정신을 실천에 옮길 때 교종의 지시를 존중함은 무엇보다 중요한일이 아닐 수 없다.
③막 전쟁이 발발했을 때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일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고방식의 이러한 변함이 지금 이 순간에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원죄에 대한 것부터 영혼의 구원뿐만이 아닌 개인의 구원, 보다 중대한 공동체의 구원에 이르기까지 신학을 전반적으로 다시 연구하고, 이 정신의 핵심을 온 인류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④그러면 쇄신하는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져야 할 것인가? 교회를 쇄신하려면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위해서」 우선 자신부터 먼저 쇄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천주님과 일치되기 위해서 천주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바쳐 무조건 복종하여 아무 희생도 아끼지 맡아야 하고, ㉡역사적인 그리스도와 일치되기를 도모하면서도 신비체와의 일치를 소홀히 하는 자세를 버리고 형제상호간의 유대를 긴밀히 해야 하고 ㉢세상일에 파고 들어가서 세계와의 일치를 도모해야 한다.
사실 이 세 가지는 실생활에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구별하는 것이지 모두가 오직 하나의 일치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