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와 세계평화 순례
11월 7일 來韓(내한)할 「파띠마」 성모를 맞기 위해
길 잃은 子女(자녀)의 母性愛(모성애)에의 향수
世界到處세계도처) 外敎地(외교지)까지 열광적 환영
매괴의 「푸른군단」 50個國(개국) 2백만 회원
거의 믿기힘든 은총의 기적 허다히 내려
聖母(성모)의 超自然的(초자연적) 美(미)와 眞實(진실)함의 象徵(상징)에 감복
戰爭廢墟(전쟁폐허) 속 희망 갈구하는 눈길에
1922년 6월 13일 「레리아」(FATIMA)의 주교는 교회법에 의한 소송 즉 「파띠마」 발현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 심사를 가졌다.「리스본」의 세레제이라 추기경은 『파띠마는 폴투갈의 「파띠마」일뿐 아니라 전세계의 「파띠마」이다』고 말했다. 『「바티마」는 이제 전 세계를 위한 신앙과 보속 그리고 히망의 한 중심이 되어있다』고 말했다. 1942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공식적으로 인류를 하자없으신 성모 성심께 성대히 봉헌하셨다.
오늘에는 「파띠마」에서 위독했던 폐병의 완쾌를 보았던 페아튼 신부가 미국에서 라디오를 통해 가족적 묵주신공과 성로신공을 지도하고 있는 중이며 지금도 그 가족적 묵주신공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 무려 1500만명에 달하고 있다.
1945년 세계제2차대전이 끝났다. 전후의 폐허 가운데서 한가닥 영구한 자유와 평화의 희망이 솟았다. 그 피비린내 나는 상처와 고통 그리고 죽음을 눈앞에 보았을 때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신앙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강화하기 위한 시대적 명령을 그리스도교적 힘과 뜻에서 체험할 때 자연 눈길은 「파띠마 메씨지」로 향했다.
벨기이의 한 신부는 「파띠마」 성모상을 성대한 의식 가운데 벨기이로 모셔올 계획을 했다. 그런데 1946년 벨기의의 「갠트」에 있을 국제가톨릭부인회대표자회의 기회에 전쟁으로 우울한 구라파를 두루 「파띠마」 성모상을 모시고 다니면서 그 「메씨지」를 전파해 볼 생각이 떠올랐다.
그같은 생각을 그전에 이미 베르린의 한 본당 신부가 품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의 그 성상은 「파띠마 메시지」를 뚜렷이 나타내고 있었다.
1947년 5워 13일 그때까지 「파띠마」 교구청에 있었던 그 성모상은 순례자들에 의해서 화관으로 장되었다. 소련의 한 소녀가 군중 가운데 나와 친히 쓴 쏘련이 봉헌문을 성모님께 낭독했을 때 그 광경은 감격적이었다. 그리고 나서 거대한 행렬로 그 성모상을 모시고 꽃으로 장식된 폴투갈의 거리를 지나 국경에 에르렀다.
스페인 국경에서 성모상은 신심깊은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으니 개선문 위에는 『스페인은 당신 발 아래 있나이다』하는 글을 써두었다.
평화의 여왕 성모상을 모신 행렬은 스페인과 프랑스 그리고 룩셈불크를 거쳤다. 이는 그 성모상이 구라파를 횡단한 첫번째의 여행이었다.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승리를 축하하는 환영을 준비했다. 그 마돈나에게서 두고 두고 애타게 기다렸던 평화이 사자(使者)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이들은 이렇게 뜻을 이룬 사실은 오직 사람이 만든 것에 불과한 이 성상의 공경보다 이 성상이 상징하는 그 힘에 기인함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이 성상이 천주이 성모 마리아의 초자연적 아름다움과 진실함의 상징임을 알았다. 그리고 이 성모상은 하나의 사적계식(私的啓示) 가운데 목동들에 한 「메씨지」를 전달했다는 한 역사적 사건을 상기케 하지만 그것이 또한 전 인류에게 관한 것임을 그들은 깨달았다.
1947년 미국에서 「푸른 군단」이 발족했으니 한 신부가 죽을 병에 놓인 그의 생명을 마리아를 섬기는 일에 온전히 바침으로써 그 병이 나아 오늘 거의 50개국에 걸쳐 2백만 회원을 가진 이 신심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1948년 4월 2일 그 「파띠마」 성모상은 아프리카를 방문하기 위해서 길을 떠났다. 폴투갈 식민지와 남아프리카는 열렬한 환영으로 그 성모상을 맞이했고 남아프린카 프로테스탄연합교회와 「마호메트」교가 지배적인 그곳 주민들까지도 경건한 자세로 거리를 메웠다. 「두루반」의 성공회 주교는 그 성모상이 자기의 주교좌성당에도 와 주기를 청했고 「마호멭」 교인들은 그 성모상에게 떳떳이 공경을 표명했다.
1948년 오스트라리아 브라질 알젠틴 영국 그리고 그외의 나라들이 하자 없으신 성모 성심께 봉헌되었고 1951년 10월 13일 성년()聖年)의 폐막식이 「파띠마」에서 있었다.
교황 비오 12세께서 「파티마」에 관해서 세번이나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말씀하시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마리아의 순례 여행에 관해서도 언급하셨다. 『1950년의 이 성년을 돌이켜 볼 때 하나의 적지않은 위안의 「비젼」이 나의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천주의 천사가 아니라 천상의 여왕이 성년을 기해서 (그의 성모상이 순례하는) 모든 지방으로 특히 마리아를 세계의 여왕으로 모시도록 천상에서 나를 보호한 「파띠마」의 이 성소(聖所)를 방문 하시는 것이다. 구라파와 같이 미국 아프리카 인도 인도네시아 그리고 오스트라리아를 두루 다니는 그의 여행에서 천상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내리시고 우리는 거의 믿을 수 없고 우리 눈은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은총의 기적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착하고 충실하고 온순한 교회의 자녀들이 그들의 열성을 배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길잃은 자녀들은 모성애에 대한 향수심을 이기지 못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복음의 빛이 아직도 거의 비치기 시작하지 아니한 많은 지방에서 까지도. 아직 그릇된 사상의 그늘에 사로 잡혀있는 많은 사람들은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못지않은 열정으로 마리아의 방문을 열망하고 마리에게 격렬한 환희를 보내며 그를 공경하고 주어진 은총을 받고 있다. 천상 순례자의 자모적 눈길 아래서는 분열시키는 민족과 종족의 반대가 없고 갈라 놓은 국경이 없으며 적대시하는 관심의 대상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이들은 이 눈길 안에서 서로가 형제로 깨닫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1953년 5월 5일 부활 축일에 미군목 신부였던 스트람스키 신부는 전방에서 「파띠마」서 보내온 자그마한 순례 성모상을 모시고 평화이 순례를 시작하여 끝내는 그 성모상을 모시고 서울 춘천 대구 부산 마산 대전 그리고 인천으로 차례로 돌아 다녔다. 수천의 신자들은 「파띠마」 성모께 서약을 했던 것이다.
한국의 전쟁이 치열했던 때 그 성모상은 「파띠마」에서 한국으로 왔었다. 휴전 협정을 보지 못했을 때 미군종신부는 전방에서 「파띠마」성모상을 모시고 다녔고 많은 군인들은 평화를 위한 기도의 무기로 싸울 것을 굳게 약속했던 것이다.
1955년 4월 5일(부활축일) 노 주교께서는 이 성모상을 「한국 평화의 여왕」으로 성대히 모셨고 많은 주교들은 자기의 교구를 하자 없으신 성모 성심께 봉헌했다.
「파띠마」 발현 50주년을 맞이하여 「파띠마」의 주교는 순례 성모상을 모시고 미국 특히 그 성모상이 아직 가지 아니한 동양의 많은 나라들을 방문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그는 10월 13일 「바띠마」에서의 거대한 축일을 지낸뒤 비행기편으로 성모상을 모시고 세계여행에 오른다. 먼저 「루르드」에서 시작하여 「빠리」 「베르린」 「프라그」 「비엔나」 「로마」 「아텐」 「다마스코」 「테헤란」 「카랏치」 「뉴델리」 「차옷타」 「방콕」 「사이곤」 「마닐라」 「홍콩」 「대만」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한국 서울에 오신다. 「파띠마」의 주교는 큰 「파띠마」의 순례 성모상을 모시고 11월 7일 서울에 도착 하실 것이다.
요왕 23세 교황게서 『마리아여 이는 당신이 때이니이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날을 위한 것이 되기를 바란다. 『한국에서 그것은 마리아 당신의 때이니이다.』
하 안또니오(부산 중앙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