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發(개발)되는 農村(농촌)찾아 - 疏外(소외)된 社會參與(사회참여)의 動脈(동맥)] ⑦ 하양 舞鶴農場(무학농장) (上)
農村司祭(농촌사제) 李(이) 神父(신부)의 푸른 꿈
有畜農業(유축농업)·精神生活(정신생활) 밑거름
舞鶴山(무학산) 중턱에 沃土(옥토) 25町步(정보)
무학(舞鶴)이라, 그 이름 좋다. 학(鶴)들이 춤을 추는 선경(仙境) 하양은 경북경산군의 부면(面富)이다. 대구에서 경주로 가는 국도 24km지점, 금호강의 비옥한 유역 따라 옛날부터 사과와 과수묘목의 특산지로 이름이 높지마는 이러한 영농(營農)은 대개가 많은 농업자본을 요하므로 도시의 일부부유층의 전유물처럼 되어 일반농민들은 언제나 영세성(零細性)을 면치 못한 채 이 지역농민들은 대대로 가난 속에 살아왔다. 무학농장은 하양본당에서 서북으로 5km지점 무학산(6백km) 중턱 해발 3백50m지점의 광활한 분지에 위치하고 풍부한 지하수와 아울러 축산의 적지다. 농장의 총면적 99정보 개간 가능지 77정 중 현재약 25정을 개간하여 옥토를 만들어 놓고 있다. 무학산은 경북 명산 팔공산(1,190m)의 정기를 나눠받고 무학의 그 정기가 동서로 흘러 금호강으로 내리는 「목」을 타고 하양성당이 앉았으니 이곳 면민들은 성당터를 찬양하기도하고 원망하기도 한다. 무학산의 정기를 성당이 독차지하여 우리는 부귀영화란 바라볼 길 없이 밤낮 이처럼 가난하다고 옛날 이 성당을 창건한 「프랑스」 신부님이 풍수설에도 밝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하양성당 주변에는 학자들이 많이 났다. 효성여대학장 전석재 박사가 그러하고 서울대학총장 최 박사도 이곳 출신이다. 그밖에 경향각지의 많은 대학교수들이 이곳을 고향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무학산은 많은 학박사를 배출한 반면 장군이나 정치가 또는 고관들이 났다는 말은 없다. 무학은 아마예지의 神 성신이 하늘에서 학처럼 날라 내림을 뜻함인가? 본당 李 신부는 과묵한 시골사제로 오랜 농촌전교에 많은 피로를 눈언저리에 싣고 공허한 시선을 멀리산기슭 총가에로 돌린다.
「전교해보겠다고 무척 애를 썼다」는 것이다. 교리반도 유치원도 시골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아담한 종합병원도 중고등학교도 설립했고 그리고 무료진료반도 순회시켜보았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경제 때문에 신앙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보다도 신앙문제를 생각하기에는 그들은 너무 가난하고 너무 버림받은 생활이 있다. 우선 그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놓고 볼일이다. 농민들의 생활이 도시민들과 격차없는 생활을 할 수 있는 날 그들에게 신앙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생길 것이 아니겠는가? 농가의 연수입(年收入)이 7만5천 원, 만일 자식한 놈을 가까운 대구에서라도 공부를 시킬려면 수입의 반인 3만 5천원은 있어야한다. 이래서야 농민들에겐 문화생활이나 더구나 오락시설 같은 것은 그림의 떡이요 공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李 신부는 자주 무학산을 바라보았다. 무학산아 학자는 이것으로 족하다. 그 정기를 돌려 가축을 길러라. 유축사업. 이것이 李 신부가 반평생을 농민들과 같이 살며 얻은 체험이다. 우리는 축산이라고 하면 곧 패물이용, 산야의 잡초만 생각하기 일쑤다. 사료작물을 경작하여 축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李 신부는 검은 수단을 농군복으로 갈아입고 무학산에 올라가서 화본(화本)과 식물의 시험재배에 착수했다. 2년간의 시험으로 확신을 얻었다. 5년전의 일이다. 토양 PH6·5, 고도 3백60m, 수량 수질 다 좋다. 사료작물의 자가 생산과 축산의 최적지다. 경제면에서도 그러하다. 유우(乳牛) 1두(頭)의 사육비가 가령 가까운 대구에서 1일 3백20원, 하양평야지가 1백20원인데 이 농장에서는 1백10원이다. 돼지는 하로 26원이면 족하다. 이 지역에는 종돈으로 「렌드레스」와 「쥬록」의 일대 잡종이 가장 유리할 것 같다고 한다. 李 신부의 꿈은 우량품종을 많이 번식시켜서 농가에 무상(無償) 공급하여 집집마다 유축농가로 소득의 증대와 아울러 장차는 정신생활에 밑거름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계속)
金達湖 記(本社論說委員·慶大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