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宗敎觀(종교관)] ⑫ 選民意識(선민의식) 지닌 信仰人(신앙인)의 옹졸
宗教(종교) 以前(이전)에 더 중요한건「良心(양심)의 命分(명분)」
발행일1968-07-28 [제628호, 4면]
제목이 엄청납니다.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宗敎가 뭣인지 모르기 때문에 거절했읍니다. 그러나 너무 어렵게 생각지 말고 써보라기에 그저 내 나름대로 宗敎라는 걸 또는 信仰하는 사람들을 보고 느낀 것 宗敎를 「테마」로 한 작품이나 이야기를 보고 듣고 느낀 대로 말해보렵니다. 이따금 믿는 친구들과 식사를 하게 되면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걸 보는데 이런 경우 너무 격식 차리는 건 어떤 造作感을 줘서 불유쾌하기까지 합니다.
벌써 첫印象이 不自然스럽고 僞善과 거짓이 內包된 듯합니다. 기도를 탓하는게 아니라 기도하는 眞實性을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거리에서 어떤 傳單을 받은 일이 있읍니다. 나는 傳單을 받고자 웃었읍다. 무슨 大傳道講演會의 傳單이었는데 傳單끝에는 이런 귀절이 덧붙여 있었읍니다.
『연보는 절대로 거두지 않읍니다.』
이 귀절 속에는 「연보」가 얼마나 지긋지긋한 존재처럼 또는 강요되어온 성질의 것인 것처럼 되어왔다는 걸 긍정하고 있는 것 같았읍니다. 강요된 연보는 이미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貧者의 一燈」
가난한 사람의 참뜻이 깃든 연보라면 한푼도 좋고 십원 한장도 어떻겠읍니까.
언젠가 친구의 죽음 때문에 화장터에 간적이 있읍니다.
관을 앞에 놓고 스님들이 염불을 하고 있었읍니다. 어떤 사람의 관 앞에서는 간단히 염불을 끝냈고 어떤 사람의 관 앞에서는 오랫동안 염불을 했읍니다. 뿐만아니라 염불하는 자세에도 날치기와 정성 두 갈래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읍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옆 친구에게 슬그머니 불어 보았읍니다.
『이 사람아, 극락세계에 가는데도 돈이 있어야해』
함축성 있는 이 말을 듣고 나는 미처 몰랐구나. 생각했읍니다. 실상 연보現實化 施主現實化가 곧 信仰과 正比例하는 바른 길이라면 이전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반·고흐는 畵家가 되기 전에 한때 神學徒였읍니다. 고흐는 神學校다니던 어느 해 추수감사절에 교회연보 주머니에다 회중시계를 집어넣은 적이 있었읍니다. 고흐家 대대로 물려나온 시계였기에 시계뒷 등엔 선조의 이름이 새겨있었읍니다. 교회에선 이 시계가 화제로 올랐읍니다. 교회에서 주인공인 고흐에게 시계를 잃어버리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고흐는 의젓이 자기가 바친 것이라고 대답했읍니다.
또 그는 가죽장갑을 벗어서 연보주머니에 넌 일도 있었습니다. 남들은 이런 고흐를 보고 웃었지만 고흐는 착하고 정직했읍니다.
정성껏 분수에 맞는걸 바친것 뿐이었읍니다. 고흐의 목사생활은 짧았으나 그는 한때 탄광촌의 가난한 광부, 버림받은 광부, 병든 광부들을 돌보며 편들다 과로로 쓰러져 오랫동안 신음했읍니다. 이것이 큰 계기가 돼서 그는 목사직을 떠나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轉換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의 그림을 아주 좋아합니다. 고흐의 그림은 그대로 고흐 그 人間입니다.
映畵 「워터·푸론트」를 나는 네번이나 본 걸로 기억됩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신부를 보았을때 나는 「신부라는 건 저런 사람이로구나」 했읍니다. 올바른 편에 서서 짖눌린 편에 서서 싸우는 신부 빼앗기는 부두노동자들의 權益을 위해 신부는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정의의 편에서 싸웠읍니다.
그는 한사람의 용감한 信徒가 정당함을 웨치다 깡패 「보스」들에 의해 죽어간 것을 보고 이렇게 울부짖었읍니다.
『…내게는 敎區가 따로 없다. 가는 곳마다 敎區다. 여기 十字架를 메고 죽어간 또 하나의 거룩한 희생자가 있다.』
내 편견일까요. 믿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끼리 자기네만이 어떤 選民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색해보이거나 옹졸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좀 더 開放的이었으면 합니다. 가령 이런게 일리있는 말이라면 改革이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
신도끼리만 하는 결혼 이런 것도 옹졸해 보입니다. 마귀와 결혼해서 천사처럼 이끌어 들일 수는 없을까요. 세상에 날때부터 信仰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또 날때부터 마귀같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거짓을 말하면 안된다고 교회에서는 매일처럼 말합니다. 허지만 진실을 보고 外面하는 것도 일종의 거짓입니다.
얼마전 北美長老敎總會인가 어딘가서 문제된 祈禱文을 대충 신문에서 본적이 있읍니다. 나는 그 기도문을 보고 우리의 現實도 부합된다고 느껴졌읍니다. 앵무새처럼 聖歌나 부르고 日曜日마다 꼬박꼬박 敎會에 나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 것입니다.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그러나 실상 믿는 사람들은 이 귀절을 어떻게 生活과 直結시키고 있을까요.
옆집에선 차별받고 굶주리고 버림받고 있는데 모르는척 外面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 아닐까요.
宗敎以前에 보다 중요한 건 「良心의 命分」이라고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聖書는 소중한 것일 겁니다. 그러나 聖書를 읽는 마음이 보다 중요할 것 같습니다. 참된 마음이 없이 아무리 聖書를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차라리 한편의 小說을 읽는 것이 훨씬 좋을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생각 나는게 있읍니다. 여러 宗教의 聖書가 너무 어렵습니다. 어째서 쉬운 우리생활에 맞는 現代語로 옮기지 못합니까. 요는 聖書의 內容이지 表現은 아닙니다. 聖式을 집행하는 主管者의 특수용어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때가 허다합니다.
宗敎가 뭔지 信仰이 원지 알고 싶어서 문턱에 들어섰다가도 되돌아오게 됩니다. 알쏭달쏭한데 어떻게 뭣을 느낄 수 있겠읍니까.
信仰의 生活化란 말이 들립니다. 寺刹이 속세를 떠나있는데 어떻게 生活化합니까. 물론 敎會나 寺刹에 꼭 가야만 信仰을 할 수 있다는 법도 없긴 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宗敎와 信仰을 잘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宗敎와 信仰이 많은 사람들에게 모르게끔 만들어 놓았다는 책임도 있을 것입니다. 느낀 대로 他意없이 써본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