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結婚(결혼)] 內的姿勢(내적자세)와 儀式(의식)
婦愛(부애), 普遍愛(보편애)로까지 醇化(순화)돼야
外形(외형)보다 虔敬(경건)한 마음 준비 갖추고
간결 · 단순 · 靜寂美(정적미) 지니고
「드레스」 · 예식장 · 청첩장 남발 등 虛飾(허식) 버려야
호젓한 旅行地(여행지)서 一生(일생) 지닐 靈的追憶(영적추억) 마련
태초에 천주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셔서 그것을 인간에게 맡겨주셨을 때 천주님은 「섹스」의 창조를 잊지 않았었다. 얼마나 고마우시냐? 결혼의 원동력은 「섹스」다. 「섹스」의 오묘한 창조가 없었다면 인간은 평생 결혼한번 못해보고 마칠 것이 아니겠느냐?
그보다도 「아담」과 「에와」는 이 번성한 자손들의 영화를 누려보지 못하고 「아담」 당대로써 멸종되어 가문을 잇지 못하고 말앗을 것이 아니겠는가. 至善하신 천주님의 창조의 뜻을 계승할 이 원동력인 「섹스」 또한 善한 것일진데 이 선한 것을 더럽히는 자 누구냐. 인간이다. 천주님의 지극하신 은혜로 얻어받은 인간의 理性이란 것이 천주님께 종종 배신을 하는 것이다.
「섹스」는 시닙로운 것. 평생 알지 못하던 두 사람이 이 원동력에서 시작하여 숭고한 사랑의 경지까지 그것을 순화시켜 형제애에까지 그 폭을 넓혀간다. 평생 알지 못한 노인을 「장인」 「장모」로 모시고 「시부모」로 공경하여 아버지 어머니로 정을 쏟게 마련이다. 신비롭지 않느냐. 처외삼촌까지 찾게되니 이 얼마나 오묘하냐.
이 강력한 사랑의 원동력에서 해방되고 천주님이 원하시는 질서(秩序) 속에서 합쳐지는 유일한 길은 오직 결혼의 길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혼배성사를 받아 서로의 의사표시와 그 정당성의 피로(披露)에 이어 모든 사람들의 동의와 축복을 받을 때까지의 준비에 우리는 너무 등한하다. 순결한 몸과 마음으로 결혼을 마지하자. 결혼의 예가 성립될 때까지 순결한 사람들은 반드시 그 결혼 새오할에 성공하는 법이다. 수도자가 허원(許願)을 하기 위해서 피정을 한다. 신품성사를 받기 위한 피정은 이마에 핏땀이 흐르도록 천주님과 대화한다. 그런데 혼배성사를 받을 남녀는 왜 피정은 하지않고 결혼 「드레스」나 청첩장 인쇄만 신경을 쓰느냐?
독일문학사에 오늘도 찬란하게 빛나는 표현주의 시인 요하네스 조르게는 사랑하는 수산나의 손을 잡고 결혼준비로 이태리 시골본당을 순례하며 같이 기도하였다. 어떤 시골 본당신부님은 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도 청순하며 오누이 간인줄 알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들은 이태리 시골 성당에서 고요하고 엄숙하게 혼배성사를 받았던 것이다. 부인 수산나의 수기를 읽으면 조르게는 혼배성사를 받은 후 실로 6개월 후에야 아버지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처럼 그들은 순결했고 경건했다.
우리나라 젊은 애인들은 왜 그렇게 결혼의 형식적인 일에 골몰하고 소란을 피우느냐. 유독 혼재성사만은 인간과 인간 즉 당사자 두 사람들만의 성사(聖事)인데 청첩장은 왜 수백장씩 풀어먹이느냐. 그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의 결혼을 진정 축복해 주고 장래 생활까지 염려해줄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예식장이란 또 무엇이냐. 왜 아름다운 결혼식을 상업주의에 이용당하며 체면에 못이겨온 뭇 사람들의 소란 가운데 혼탁하게 하느냐. 참말로 두 사람을 아껴주고 진심으로 축복해줄 가까운 몇 사람의 친구와 친석들만 오게하는 것이 옳겠다. 그 고지서 같은 청첩장의 난발은 삼가했으면 좋겠다. 사람이 많이 모인 결혼식, 종이쪽으로 만든 화환을 많이 내려놓은 결혼식을 화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형식주의를 보라! 진정 화려한 혼인은 천주님의 축복의 촛불을 밝히는 결혼식이다. 좋은 결혼식, 백년해로하는 그날까지 잊혀지지 않는 결혼식은 천주님의 사랑과 두 사람의 사랑이 속세를 잊고 꿈결같이 혼연일체가 되는 그런 결혼식이다.
그래서 신혼부부는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냐? 두 사람만의 조용한 시간을 가지기 위함이다. 여행지에서 버려둔 듯한 성당에 두 사람이 같이 미사에도 참여하고 성체 조배도 해보라. 축복받은 두 사람의 새로운 사랑이 또 솟아, 성당문전에서부터 깨가 쏟아지리라. 결혼기념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두 사람만의 명절이다. 후일에 그 시절을 생각하며 구혼여행을 가보라. 그리고 같은 성당 그자리에서 감사의 기도와 혼배재서약의 손을 가만히 잡아보라. 백년해로의 자신이 생길 것이다.
결혼은 조용하게 간결하게 단순하게 하는 것이 아름답다. 허례와 허식을 버려라. 결혼식은 「쇼」가 아니다. 신부(新婦)의 「드레스」는 또 무엇이냐. 청초한 한복, 게절에 맞는 옷이 우리몸에 우울릴텐데 왜 구제품 신부같은 꼴을 해서 「쇼」의 주인공이 되느냐. 더구나 울긋불긋한 자동차를 꼭 타야 할 아무 이유도 없다. 요셉이 성모 마리아와 혼례를 올릴 때 요셉의 손에는 생기 돋은 옥잠화가지 하나밖에 없었다.
얼마나 단순하며 아름다웠으랴. 결혼을 속화하지 말고 그 품위를 올려보자. 마음이 소란하고 울긋불긋해서야 어떻게 차분한 묵상이 되겠느냐. 젊은 애인들 명심할지어다.
金達湖(慶大文理大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