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蟋蟀(실솔) (4) 兄弟(형제) ④
발행일1967-10-29 [제591호, 4면]
정식은 가느다랗게 _자로 꾸부러진 복도를 내려다보며 윤식의 방으로 갈가 말가 하고 한동안 망서렸으나 몸을 돌렸다.
『내 알바 아니다』
중얼거린 정식은 얇삭한 입술을 꾹다물었다. 그리고 발끝을 내려다보며 마치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마음 속으로 헤어보듯 느린 동작으로 자기 방을 향해 올라간다.
『어디 내 책임이야 윤식은 이미 미성년은 아니다. 설령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하지만 나는 아니란 말이야, 어디까지나 어머니 아버지가 관여하실 일이지』
이기적인 속삭임이 그를 이층위로 밀어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속삭임은 충분히 납득할만한 것이 못되었고 정식의 마음 한구석에서 자기염오의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끝내 발길을 되돌리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으며 방문을 닫고 말았다. 창가로 간 그는 시가를 내려다 본다. 오수에 빠진듯 시가 역시 권태로운 정적 속에 있는 것 같이 정식은 느꼈다. 사실 시가에는 무수한 사람과 차량이 달리고 있었건만, 그리고 무수한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건만 정식에게는 한낱 정지된 풍경화로밖에 의식할 수 없었다. 다만 이글이글하게 타고 있는 태양만이 생명인 것 같았고 또 그것은 영원한 생명인 것 같았다.
윤이의 미소짓는 얼굴이 한순간 정식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생명감에 넘쳐있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그대로의 얼굴이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창백하게 가라앉은 얼굴은 순간 가면을 연상시켰다. 그것은 죽음의 표상이요 결코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그대로의 얼굴이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갓다. 창백하게 가라앉은 얼굴은 순간 가면을 연상시켰다. 그것은 죽음의 표상이요 결코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그대로의 얼굴은 아닌 것 같았다. 오수에 빠진듯 권태로운 정지의 상태.
정식은 창가에서 물러나 커튼을 치고 침대에 와서 벌렁 나자빠졌다. 그러면서 한팔을 들어 선풍기를 틀어놓고 팔목의 시계를 본다. 윤이하고 만나게 될 여섯시까지! 아직은 세시간 가량이나 남아있었다. 그는 한두시간 눈을 붙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윤이가 표는 두장뿐이라 했는데 무슨 표일까? 음악회? 아니면 연극일까?)
하다가 몹시 신경이 피곤했던 그는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정식이 눈을 떴을 때 그는 가슴 위에 무거운 압력을 느꼈다. 몸부림치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여전히 가슴은 답답하고 큰 바위가 전신을 누르고 있었던 것처럼 고통스러움을 느낀다. 정식은 선풍기를 끄고 담배를 붙여문다. 전신에 땀이 흠뿍 흘렀다. 소란스럽고 몹시 흉한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떤 꿈이었는지, 많은 꿈이 겹쳐와서 하나의 줄거리로 엮어내지 못하였다.
『윤식이를 때린 탓이겠지. 피를 본 탓이겠지』
다매연기를 뿜어내며 막연히 중얼거렸다.
직안은 괴괴했다. 사람의 소리라곤 들려오지 않았다.
시계를 본 정식은 비로소 윤이와의 약속을 생각했다. 여섯시 십분전, 그는 담배를 눌러 끄고 급히 서둘렀다.
그들이 만나는 싸롱 흑묘(黑猫)에 정식이 들어섰을 때 윤이는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
정식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몰라요!』
윤이는 일부러 화난척 하며 눈을 흘겼다. 정식은 마즌편에 앉으며
『무슨 표야? 음악회?』
하고 물었다.
『초대권이예요. 일부러 동무가 보내주었는데 그애 독창횐데 참…어떻게요?』
『낮잠을 자다가 그만』
『태평하게 말이죠? 무관심했다는 증거지 뭐예요?』
『기분 나쁜 일이 있었거든 아무튼 늦어서 미안해』
『기분이 나쁜데 잠이 와요?』
윤이는 살피듯 물었다.
『신경이 피곤해지니까』
『이상하네요. 난 기분이 나쁘면 밤에라도 잠이 안오는데?』
윤이는 화를 풀면서 정식의 눈을 들여다보듯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눈동자가 오무러들듯 윤이의 표정은 심각했으나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얼굴은 동녀를 느끼게 했다. 오랜지빛 「원피이스」가 다시 그의 성숙함을 나타내어 뽀요얀 피부가 노을을 받은듯 아름다웠다.
정식은 이러한 윤이의 얼굴을 가장 좋아했다. 그는 황홀한 마음으로 윤이의 눈을 마주 보다가
『그럼 서둘러 가야 하잖어?』
하고 물었다.
『누가 이제 가요? 도중에 들어가는 것 기분 안나요. 게다가 정식씨는 저기압이라는데 뭐』
『이제 풀렸어. 윤일 만나니까 저절로 풀어지는군』
『나도 화 풀어졌어요. 우리 이대로 얘기하다가 저녁 먹구 또…』
윤이는 빙긋이 웃었다. 정식이도 빙그레 웃으며 윤이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또 뭘 할까?』
정식은 소년처럼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건 저녁 먹을 때 생각해요. 그보다 뭣때매 기분이 나빴는지 그것부터 보고해요』
순간 정식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윤식이하고 싸운 일을 생각해서 그랬다기 보다 그에게 벼란간 꿈의 한토막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까까지종잡을 수 없었던 꿈의 한 장면이 선명하게 눈앞에 떠올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