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世俗에의 開放
③새로운 人間像
교회는 복음을 현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새로운 인간상(人間像)이 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미 지(未知)의 자연력에 매어었다고는 느끼지 않는 다. 우리는 신(神)이 세계를 우리의 손에 맡겼다고 인정한다. 이 세계를 살기 좋고 평화로운 세계로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책임이다. 이번 공의회가 마련한 현대 세계에 있어서의 교회 사목헌장(司牧憲章)은 정의·평화·사랑의 새 세계 건설에 있어서 모든 그리스도 신자의 개인적 책임이 막중함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 드릴 때에 많은 결과가 생긴다. 즉 우리 그리스도신자인 평신자와 성직자는 세계의 요구와 고민(빈곤·전쟁·고독·차별대우)에 대처하여 그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 모색(模索)을 국가나 교회 고위당국(高位當局)만이 책임질 과업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태만은 세계의 불행을 계속 불러일으키는 것이 된다. 각자는 자기의 처지에서 평화를 재건(再建)하고 빈곤을 타파하며 일체의 차별대우를 적극 거부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인 사랑의 법을 각자의 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신자의 개인적 책임이다.
그러므로 사제는 고백소에서 사랑의 율법을 신자들에게 강조해야 한다.
사랑의 율법은 외적 행위보다는 오히려 내적동기(動機)와 태도에 달려 있다. 사랑은 사람의 가장 깊은 속마음과 직결되는 하나의 실재(實在)이며, 그 때문에 또한 가장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산아제한(産兒制限) 문제는 골치거리가 되고 있다. 신체의 기능(機能)보다 사람의 본질에 중점을 두고 살핀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가 있다. 즉 성생활(性生活)에 관한 정확한 규정(規定)의 「리스트」를 만들 수 있을까? 『서로 사랑하고, 자기의 입장에서 자기의 사랑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매일 반성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율법이 아닐까?』 화란신자들은 이러한 면에서 어떤 길을 진지하게 찾고 있다. 결혼은 자녀 출산을 위한 제도(制度)가 아니라 두 사람의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사랑의 결합으로 설명하는 것이 공의회의 정신이라 생각된다. 이같은 사랑의 결합은 자녀란 열매를 낼 수 있다. 화란 교리서는 이러한 논거(論據) 아래 기혼자의 성생활에 관한 세칙(細則)을 단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모든 부부는 특별한 경우에 개인적인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는 원칙을 지지하고 있다.
■ 프로테스탄트 형제 向한 開放
①예수와 聖人들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에게 대한 개방은 단순히 우리가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우리는 복음과신 신자생활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교회는 많은 가톨릭신자들의 실생활 속에 파묻힐 만큼이나 많은 성인들을 내세워 놓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仲介者)라고 한 성 바오로의 말(띠모테오전 2·5)을 많은 이들이 잊은 듯 함은 사실이 아닐까?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우리가 이 사실을 다시금 눈여겨 보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새 성당 안에 마리아 상이나 성당수호자상을 둘 자리를 자그마한 모퉁이에 남겨두고 성당 중심부에 있는 제단과 십자가에 관심이 쏠리게 하고 있다. 우리 성당이 동정 마리아나 성 안또니오에게 9일 기구를 바치기 위해서는 꽉찼지만, 미사참여하는 신자들은 다섯 손가락으로 손꼽을 정도로 드물었음은 이상한 일이 아닐까!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있었다! 그렇다고 화란에서 성모나 다른 성인 공격을 위한 9일 기구나 특별신심 행사가 없어져 가고 있는 줄로는 생각지 말 라! 우리가 성인 공격을 집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새로운 방법으로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를 강조할 따름이다. 우리가 성인성녀들 안에 숨어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열매를 공격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중히 여길 수 있겠는가?
②聖經
우리는 우리자신을 프로테스탄트 형제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수백년 동안 교회의 성전(聖傳)은 성경 외에 또 하나의 진리의 원천임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강조하여 왔다. 우리는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이나 동정 마리아에 대한 교리를 말해주는 신약성경 구절이 어느 것인가를 질문 받을 때에 이렇게 대답하기가 일수였다. 『그건 성경에서는 찾지 못합니다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부터 내려온 구전(口傳)으로 그것을 알고 있읍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귀찮스레 성경을 읽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공의회는 확실히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의 증언에 힘입은바 있어 성경이라는 기름진 토양에 그 뿌리를 박지 않은 경우 어떠한 진리도 교회에 공포될 수 없음을 수긍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제 줄곧 이런 방향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 보다 가톨릭신자들에게 더욱 강하게 현존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우리보다 성경을 더 많이 공부하기 때문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그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더욱 잘 알고 있읍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고 주일 전례의 서간경 및 복음 말씀보다 더 많은 부분의 성경을 읽어야 한다.
교회일치 운동을 개시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신자단체와 접촉해보니 많은 프로테스탄트가 그리스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반면에 많은 가톨릭신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문답 정도로만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리하여 우리는 많은 성경연구 그룹을 새로 만들어 회원들이 성경본문을 읽고 토론하게 하였다. 화란 주교들은 이것을 격려해 주고 있으나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으므로써 언젠가는 교회의 습관이나 관례들 중에서 복음의 멧세지에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연구로 말미암아 성경은 불안의 근원이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유익한 불안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성전(聖傳)과의 관계를 끊고저 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이 사실상 무엇을 말하는가를 근원적(根源的)으로 알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화란의 새 교리서는 전반에 걸쳐 성서적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이다. 많은 프로테스탄트 비평가들은 이 교리서에 매우 호감을 가졌었다. 그들의 인정을 받은 것도 바로 이러한 성서적 분위기 때문이다. 비록 그 특유 어법(語法)에는 익숙되어야 하겠지만 사실 이 교리서야 말로 가톨릭의 참된 문서(文書)다.
주지(周知)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때는 바로 1968년 이다. 그러므로 모든 메세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백년 또는 50년전에 사용했던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진리를 전해야 한다. (끝)
李洪根 신부 譯(경북河腸본당 보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