刷新(쇄신)의 道程(도정) ② 刷新(쇄신)의 方向(방향)
眞理(진리)의 絶對性(절대성) 永久(영구)히 保存(보존)
刷新(쇄신)의 當爲性(당위성) 表現(표현)의 歷史的(역사적) 變遷(변천)
공의회가 제시한 쇄신의 원리는 「복음에로 돌아가라」는 것임은 이미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지상명령은 결코 원시 그리스도교의 외형에로의 복귀를 말함이 아니라 순수한 믿음과 뜨거운 사랑의 복음 정신에로의 복귀를 뜻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쇄신의 방향을 찾아본다.
■ 傳統 안에 進步
우리는 다시 한번 구원의 신비가 어떻게 역사안에 실현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는 우리사이에 뿌려진 겨자씨로 표현된다. (마테오 13장 31-32, 말구 4장 30-31, 누까 13장 19절)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인 이 겨자씨는 유기체의 成長의 법칙을 따라서 발전한다. (말구 4장 26-29, 에페소서 2장 20-22, 골로새서 1장 11) 교회는 자기가 맡은 신앙의 유산인 계시를 이해함에 있어서 나날이 전진하는데 그 성장은 이질적인 부분품을 쌓아올려서 커지는 건축물이 아니라 동질적인 생명력의 발전으로 커가는 유기체로서 흡수 · 동화 · 발산의 과정을 거처간다.
교리발전의 역사를 보면 이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설교나 사도들의 설교는 그 당시의 주위 사람들이 사용하던 언어와 사물을 가지고 영원한 하느님의 설계를 표현했고 또 대중은 그렇게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후에 시대가 흐르고 언어가 변천하고 지역이 넓어짐에 따라서 동일한 그리스도의 설교를 이해함에 있어서 동질적인 다양성 뿐 아니라 이질적인 그릇된 해석이 나타남에 따라서 교회는 정통신앙을 유지하기 위하여 오류를 배척하고 일정한 표현으로 信條를 定義해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된 신조를 받아 드림에 있어서 계시 진리의 절대성과 그 진리를 표현하는 방법이나 형식의 상대성을 구벼할 줄 알아야 하고 言語의 部分性과 불충분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계시는 그것이 비록 인간과 역사에 관련되는 한 도내의 것일지라도 무한한 내용을 가진 것이기에 유한한 인간의 지혜와 언어로써 남김없이 표현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리나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국한된 환경이나 시대에서 통용되는 특수한 언어로써 표현한 어떤 命題를 영원불변한 진리의 내용 자체인 것처름 固守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언어는 시대에 따라서 語感이나 語義가 변하기 때문에 단어가 같다고 해서 반드시 理解가 同一하다고 보장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참으로 어떤 진리의 내용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하여는 표현방법을 달리해야 될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이 이른바 진리의 절대성과 표현의 상대성에 대한 이해이다.
또 다른면에서 고찰하면, 계시진리의 무한성 때문에 인간의 이해는 부분적이면서도 지성의 발달에 따라서 이해하는 면이 넓어질 수도 잇고 이해하는 정도가 깊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학의 발달이다. 이렇게 신학이 발달함에 따라서 어떤 진리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과거 보다 더 풍부하게 더 깊게 또는 과거에 보지 못하던 부분을 새로 묘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표현일지라도 그 표현의 불충분성과 부분성을 염두에 두고 내용을 이해하여야 된다. 이렇게 생가해 볼 때 시대의 산물인 어떤 언어나 표현에 대한 무비판적인 맹신이나 고집이 신앙의 순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공의회이 문서나 우리나라 새 교리서의 내용이나 표현을 보고서 마치 천주교회의 신앙내용이 변한 것처럼 놀라는 守舊派들의 기우는 가소로운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교회쇄신의 방향은 거룩한 전통을 살리되 묵은 보자기로 진주를 싸두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보석을 새 기계로 갈아서 더욱 빝나게 하는데 있음을 이해할 것이다.
■ 超越性 內在性
교회가 추상적 관념이 아니고 생활한 유기체임을 생각할 때 그 역사성을 무시할 수 없다. 교회는 역사 안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구체적인 인간들로 조직되어 있으며, 20세기 동안 박해와 현양을 무시와 존경을, 축소와 확장을 거처서 살아오고 온갖 시대와 언어와 민족과 국가를 포옹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인간적 양식이 부수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는 어떤 시대와 어떤 지역에서도 자기의 본성을 간직하면서도 각양 각색의 지역 문화를 정화하여 흡수하여야 되고 모든 민족 문화가 그리스도의 신비체 건설에 이바지 하도록 길을 열어 놓아야 된다. 그 어떤 시대의 문명이나 그 어떤 지역의 문화만이 교회적이라는 편견은 지양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오늘의 교회는 「라띤」 무노하내지는 구라파 중심주의에서 탈피할 시점에 다달았음을 깨달아야 된다는 것이다. 교회사에 있어서 「라띤」문화나 구라파 민족들의 공로를 과소평가하거나 그들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좋은 유산 위에 다른 언어, 다른 미녹, 다른 시대의 훌륭한 점을 더 보태자는 말이다.
또 「라띤」문화나 구라파민족의 업적 중에서라도 교회의 본 모습을 흐리게 할 수 있는 결점은 과감히 제거하는 용기를 바루히할 때는 도달한 것 같다. 그것은 다른언어나 민족에 대하여도 좋은 경계가 될 것이고 동시에 자기정화에 대한 격려가 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결코 空想的인 복음주의나 小兒病的인 혁신주의를 가지고 이미 자라서 큰 나무가 된 교회를 보고 무조건 원시상태인 겨자씨에로 돌아가라는 망발과 같은 주장이 아니다. 이점을 알아듣는다면 교회쇄신의 방향은 교회가 인간역사 안에 內在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의 超越性을 증명하는 것임을 이해할 것이다.
鄭夏權(神博 · 馬産주교좌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