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22) <第二話(제2화)> 榮光(영광)의 敗北(패북) ⑧
발행일1968-08-04 [제629호, 4면]
『차례대로 손님을 들어오시게 하지.』
윤 사장은 책상위에 놓인 명함을 보고 부드럽게 지시하였다.
『네.』
하고 은실은 방을 나갔다. 태도가 조금 굳은 것은 비서실 근무가 아직 생소한 탓일거라고 윤 사장은 생각하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손님을 차례대로 맞이하여 접대하는 몇 시간이 지나갔다. 윤 사장은 귀찮고 짜증이 났으나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한시 바삐 은실이와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를 얻는 것만이 윤 사장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오전 중에는 그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지금 한참 번창한 동서무역회사 사장실은 손님이 끓일 사이가 없었다. 겨우 시간이 나서 조용한 기회를 얻은 것은 오후이었다. 윤 사장은 가만히 책상 옆에 붙은 벨을 눌렀다. 윤 사장은 긴장하여 기다렸으나 사장실에 들어온 것은 은실이가 아니고 여자 사환이었다.
『나 홍차 한잔 다구』
윤 사장은 피곤한 듯 소파에 벌렁 드러누으며 말했다.
『네.』
사환이 나갔다. 아닌게 아니라 몹시 피로했다. 온 몸에 탄력이 없어지고 어깨와 허리가 쑤시었다. 윤 사장은 또 다시 초조해지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사장실문이 고요히 열렸다. 사환동이 들어오나 하고 바라보니 뜻밖에도 은실이었다.
윤 사장은 순간, 마치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사장님, 손님이 또 오셨는데 어떻게 할가요?』
은실은 명함을 내어놓았다. 대단치 않은 방문객이었다.
『내가 있다고 했나?』
『회의중이신데 시간이 있으실는지 여쭈어 보아야겠다고 그랬는데요』
『잘했군. 내가 지금 몹시 피로하니까 다음날 오시라고 그리고 옆방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홍차를 그리로 좀 갖다줘요』
『네』
『그러구 부재중이라고 하고 손님은 모두 내일 오시라고 해줘』
『네.』
윤 사장은 곧 옆방으로 들어갔다. 사장실 옆에 휴게실을 만들어 놓고 윤 사장은 피로할 때 거기서 메말라 가는 원기를 회복하기에 애를 썼다. 이윽고 은실이가 홍차를 들고 들어왔다. 윤 사장은 긴 의자에 누워 있었다. 은실은 홍차를 테블 위에 놓았다.
『손님은 가셨나?』
『네.』
은실은 고요히 나가려고 했다.
『이거 봐』
『네?』
『거기 잠간 앉아.』
『네.』
은실은 테블 앞 의자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윤 사장은 일어나서 홍차에 설탕을 쳐서 마시기 시작했다.
『양은실이라고 했지?』
『네.』
은실은 수줍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얌전하고 조신한 처녀였다. 이런 아이와 친하다면 정아도 아이는 괜찮겠구나 하고 윤 사장은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 또랑또랑하고 예리한 정아의 태도를 생각했다.
(매서운 계집애일거야)
윤 사장은 이렇게 은실에게서 정아를 연상하며 마음속으로 은근히 미소를 지었다.
『그래 비서실 근무가 어때? 고단하지나 않은가?』
『괜찮아요.』
은실은 고개를 수그렸다.
『올해 몇 살이지?』
『스물 한 살이어요.』
『학교는 어디를 나왔지?』
『고등학교 밖에 안 나왔어요.』
은실은 얼굴이 빨개졌다.
『응 그렇다면 공부를 더 해야겠군 그래. 부모님은 다 생존해 계신가?』
『네.』
『아버지는 무얼 하시지』
『회사에 다니시다가 자동차 사고로 몸을 다치셔서 벌써 몇해째 집에서 노세요?』
『응 그거 안됐구먼. 올해 연세는 얼마나 되시는데?』
『마흔 여덟이셔요.』
『나보다 한 살이 아래 시구먼. 그렇다면 은실이는 아버지 근심이 크겠지』
은실은 무슨 뜻인지 몰라서 윤 사장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몸을 다치셔서 놀고 계시니 집안일도 그렇겠고 아버지 마음이 오죽 하시겠다. 그러니 온실이 근심도 클게 아냐?』
『녜.』
은실은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은실이?』
『네?』
『은실이는 아버지를 사랑하나?』
『네?』
은실은 윤 사장의 질문에 또 어리둥절 한다.
『나이 스물한살이면 아직 어른들의 깊은 심정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를 딱하게 생각한다거나 가엾게 생각한다거나 하는 마음이 있겠지?』
『그야 머…』
은실은 고개를 들고 가볍게 생그레 웃어 보였다. 그 웃음으로 해서 사장도 한결 마음이 부드러워 지고 자신이 생기는 것 같았다.
『은실이』
『네?』
『오늘 내가 은실이 한테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 주려고 하는데 들어줄텐가?』
『네?』
은실은 또 고개를 들어 윤 사장을 바라보았다. 티 없는 웃음이 은실의 동그스름한 얼굴에 가득히 고여 있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은실이가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데 참고는 될거야. 들어둬서 조금도 손해가 나지는 않을 거야.』
『네.』
『들어줄 텐가?』
『네.』
『고마워 나는 은실이 뿐 아니라 이 이야기를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한테나 다 해주고 싶어. 그런데 이이야기를 하는 것은 은실이가 처음이야.』
『고맙습니다.』
『아니야. 고마운 것은 도리어 나지. 오래간만에 귀국해서 은실이 같은 얌전한 처녀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게 된 것을 나는 기쁘게 생각해.』
『고맙습니다.』
은실은 고개를 꾸벅하고 감사했다.
『그렇다면 편안하게 앉아야지. 그러구 내 이야기를 친 아버지의 이야기처럼 들어 줘.』
『네.』
『이야기가 조금 기니까 편하게 앉아. 지금은 사장으로 생각하지 말고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마음 놓고 편한 자세로 앉아』
『네.』
은실은 가볍게 웃으며 조금 편한 자세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