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새해가 밝았다. 온 우리에 새 희망과 기대를 가져다 주는 새해 새아침이다. 동녀가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이 어제의 태양과 다를바 없으련만 이 아침에 맞이하는 저 둥근 태양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어떤 변화를 가지고 바라보기 때문이리라. 새 기분 새 결심 새로운 전환을 다짐하면서 바라보기에 병인년 새아침이 저 태양이 저렇게도 둥글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동켝 하늘에 떠오르는 저 둥근 태양이 어느덧 거양성체때의 둥글고 하얀 성체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이글거리는 열기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정으로 바뀌어 간다. 악당들에게 잡히시기 전 그리스도는 인류 종말때까지 우리와 함께 남으시고자 자신을 빵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인류와 함께 언제까지나 성체로써 현존하신다.
이러한 완전한 희생은 원초적으로 하느님께서 독생성자를 인류의 구세주로 보내신데서부터 나타난다. 하느님이 비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것이다.
2천년전 베틀레헴의 어느 초라한 마굿간에서 구세주가 탄생하셨을 때, 그때도 웬만한 여관은 모두가 돈많은 이들의 차지가 되었고 가난한 목수인 요셉은 하루밤 쉬어갈 안식처를 찾지 못했다. 만삭이던 아내 마리아는 조산원의 도움도 없이 아기 예수를 해산했던 것이다. 돈많은 부자 어느 누구도 이 거룩한 탄생을 알아채지 못했고 자신들만의 안락을 즐기며 방한칸 내준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탄생과 성장시기의 그 괄시와 푸대접을 탓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한결같은 사랑으로 인류를 타이르시고 꾸짖으시고 마침내는 최후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만큼 인류를 사랑하셨다.
이제 인간들은 스스로 깨달아 그리스도의 제자되기를 바라시면서 그분은 성체성사를 통해 언제까지나 지켜보시며 도와주시고자 자신을 우리의 양식으로 주셨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 바로 그분을 모시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영혼의 양식인 성체는 모든 사람이 갈라먹도록 여러갈래, 여러조각으로 나누어지고 이를 받아먹는 모든 사람들은 한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안에서 하나로 일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요, 나눔의 성사요, 일치의 성사인 것이다.
새해에 새롭게 보이는 태양을 맞이하듯이 매일의 성체가 이날따라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마음에 와닿는다. 이제 이 성사를 통해 우리 모두의 마음에 사랑과 나눔 그리고 일치의 염원이 불타오르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겸허한 마음과 새로운 눈으로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자.
지난해까지 그렇게도 시끄럽고 소란스럽던 정치문제도 새아침에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보인다. 여와 야는 대립과 갈등의 관계가 아니요, 모두가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고 아끼는 입장에서 상호협조와 보완의 관계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출발한다면 지나친 말도 없고 기피할 말도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개헌이 이 시대의 최대의 쟁점인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안다. 이것 때문에 여 · 야가 싸우고 학생이 나서고 재야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 헌법이 있는 것이지 헌법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개헌논쟁 땜누에 국가각 위태로와진다면 이는 개헌파든 호헌파든 어느 입장에서나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이제 여 · 야가 일단 이 문제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것만으로도 진일보 한 것이며 개헌 특위이 명칭여하가 중요하다기 보다 쌍방이 얼마나 진솔(眞率)되이 일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셨듯이 모든 정치인 뿐만 아니라 이나라 백성 모두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ㅅ스로의 모든 것을 희생제물로 바치겠다는 각오로 임한다면 이 문제는 상상외로 쉽게 풀리지도 모른다.
엉킨 실뭉치를 성급하게 풀려고 하면 매듭이 져서 끊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가위로 끊어야 할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양손의 힘을 조금씩 늦추어 보자. 그러면 쉽사리 엉킨 실오라기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경제문제도 이런 시각에서 한번 보자. 우리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경제개발을 이룩했고 그 개발의 혜택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집중적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정부가 성장주도적인 경제정책으로 부의 분배문제를 등한시해왔기 때문이다. 후진경제수준을 성급하게 선진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은 욕망에서 개인주의 경제제도의 장점이라고 하는 성장에만 치중해 왔고 이 제도의 단점이라고 하는 불균등 배분으로 인한 빈부의 격차문제는 눈감아 왔다. 그래서 우리의 경제성장은 사실상 노동자들의 저임금이란 댓가를 치룬 것도 사실이요 농어민들의 희생 또한 컸음도 사실이다. 그뿐 아니라 원초부터 민족자본의 투자가 없이 시작된 우리의 경제개발은 자본투자에 따른 이익배당이란 고려될 수 없음에도 오늘날 기업인들이 기업자체의 높은 부채율은 그냥 두고 개인적으로 막대한 부르 ㄹ축적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부의 개발주도정책의 혜택을 일방적으로 누려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부의 불평등분배는 가진 자와 못가진 자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온갖 사회불안의 요인이 되어왔다. 이제 이러한 불평등분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부의 재분배 정책과 아울러 자발적인 배분의 원리인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공동선 원리가 작용해야 한다.
이제 새해 새아침에 이땅의 기업인들이 민족애를 결심한다면 올해에는 노동자 · 농어민들의 소요가 이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자발적인 나눔은 질서를 유지하면서 노동생산성을 높일 것이고 국내 구매력을 향상시킬 것이고 외국 바이어들을 안도케 하여 수출물량을 늘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또다른 기업이윤을 가져올 것이고 우리의 경제는 제2의 성장을 향해 속도를 더해갈 것이다. 기업인들의 결심여하로 이땅의 미래는 번영이라는 희망의 서광이 비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수많은 난제(難題)를 안고 있다. 그런데 그 어느것 하나 국민들의 이해와 협조없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국민들의 이해와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만연돼 있는 이땅의 불신풍조를 해소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뢰회복은 위에서부터 솔직하고 정식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체와 가정의 해」인 병인년 새 아침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기로 결심만 한다면 이러한 일들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닐 것이다. 2백년을 지낸 한국 가톨릭이 이제 2백만 신자를 포용하고 그 2백만이 이나라 각계각층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지 않으면서 어느 누구를 원망하고 한탄하랴! 성체를 내 마음에 모시고 우리 가정이 또 한분의 식구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다면 개인성화, 가정성화, 나아가서는 국가 · 사회의 평화와 번영이 눈앞에 펼쳐지리라.
사랑은 결심이다. 결심은 변화를 낳는다. 변화는 희망을 가져다준다. 우리의 미래는 이 순간 우리의 결심 여하에 달려있다.
서로 새해를 축복하는 인사를 나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