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15, 10~21 : 『아아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읍니까?』로 시작되는 이 탄식의 고백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예언자를 두고 시비를 건다는 처절한 고독감을 표출하는 속에 그는 자신이 얼마나 직무에 충실하였는지를 말한다. 『웃으며 깔깔대고 흥청대는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고 싶었지만 모든 환락을 멀리했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런 증오와 고독에 처해야 하는지를 토해내면서 심지어 자기가 어려울 때 야훼께서 버렸다고 『주께서는 물이 마르다가도 흐르고 흐르다가도 마르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도랑 같이 되셨다』(15, 10~18)는 무시무시한 항변을 내뱉는다.
이어 나오는 것은 예레미야의 이 격정적인 항의에 대한 응답으로써 그의 개인적인 신탁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만일 네가 예언의 직무를 계속하려면 그와같은 정신태도를 깨끗이 버려야 하며 야훼께 순종하기만 하면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질 것이다』(20절)라는 소명받을 때의 약속을 갱신해주고 있다.
③17, 14~18 : 예언자의 기도로 이뤄질 이 고백록에도 역시 그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원수와 부딪칠 때 그는 능력의 하느님과 그분의 약속에 다시 혼신을 다해 매달린다.
④18, 18~23 : 백성들이 예언자를 잡으려 할 때 하는 탄식의 고백으로 예언자의 생명을 노리는 음모가 엿보일 때 예레미야는 우리로서는 형언하기 어려운 잔인한 반응을 보여 그 음모의 부당함을 항의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하나의 성인으로서 또는 기계처럼 자기 사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온갖 약점을 지닌채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성실을 다하는 한 인간의 전면목을 대할 수 있게 된다.
⑤20, 17~18 :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간 사나이가 이제는 그만 그 짓누르는 짐을 벗어던지고 싶지만 뼈속까지 사무친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길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손을 들고마는 고백을 듣게된다. 여기서 모욕을 가져다준 야훼의 말씀과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 준 야훼의 말씀 사이에서 번뇌하고 몸부림치는 한 인간을 또 만나게 된다. (20, 7~13)
이어서 예레미야가 완전히 진이 빠져 자살하기 직전까지 이르는 절망상태에서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신음처럼 쏟아내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의 해답을 얻어낸다. 야훼께서는 결코 예레미야가 이와같은 절망이 침몰되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분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항상 이런 탄식들과 병행하는 것이 예언 소명을 주실 때 한 야훼의 「약속」이다.
하느님은 당신 약속에 「성실」하신 분이라는 그 고백은 구약 전체에 흐르는 희망이며 이 약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예언자를 끝까지 견지시켜준 힘이라는 것을 우리는 주지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다섯가지 탄식고백은 예레미야의 수난기(26~29 ; 36~45)와 상통하면서 또한 이 부문은 구약 어느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제2사야의 「야훼 종의 노래」와만 비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단락에서 하느님의 길을 걷는 사람의 생애는 고난의 여정이라는 구원사의 신비(빠스카의 신비)를 엿보게 한다. 이는 바로 현세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 겪어야 하는 길, 다시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표한 예언자의 삶은 바로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라는 것을 일러주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오 16, 24)는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더 가슴에 새기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김혜자(修女 ·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