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23) <第二話(제2화)> 榮光(영광)의 敗北(패북) ⑨
발행일1968-08-11 [제630호, 4면]
『옛날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에 한 청년이 있었지. 그 청년은 두뇌도 남 못지않게 명석했고 장태에 대한 야망도 결코 만만치는 않았어. 그리고 인물도 출중할 만큼 미끈했었지. 그러나 한 가지 가세가 변한해서 공부는 어느 부자댁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고학을 하는 수밖에 없었단 말야.』
이야기의 허두를 꺼내 놓고 윤 사장은 은실을 쳐다보았다. 은실은 그저 의자에 앉아서 고요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윤 사장은 은실의 진지한 태도를 보고 적이 안심을 한듯이 멀리창밖을 내어다 보았다. 창으로는 푸른 하늘과 그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흰구름이 보였다.
『그런데 그 부자댁에는 그 청년과 신세가 비슷한 여자고학생이 또 하나있었지 그러니까 청년은 중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이었고 여자고학생은 국민학교 아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이었단 말야. 그러고 보니까 같은 신세끼리 한집에서 사노라니 두 가정교사는 자기들도 모르게 서로 친하게 되었단 말야』
윤 사장은 은실을 보고 웃었고 은실도 입가에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어려운 가운데서 돈을 모아서 여자 가정교사는 스웨터를 짜서 남자 가정교사를 입히기도 했고 어떤 때는 음식을 가져다가 슬그머니 남자 가정교사의 방에 넣어 주기도 했지. 달이 밝은 겨울밤에 두 사람은 추위도 잊어버리고 어깨를 나란이하여 호젓한 길을 밤이 깊도록 함께 걸었단 말야. 비록 당장에는 궁색해도 꿈은 그야말로 무지개처럼 찬란했던 모양이지』
윤 사장은 이렇게 이야기를 벌려 놓고 가슴이 벅찬듯이 잠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길게 뿜는 담배연기가 유리창에 구름처럼 서렸다.
『부자댁에서 인심이 후하다고 하지마는 남자가 정교사는 그때 전문학교에 재학중이었는데 항상 넉넉지 못한 학비로 쪼들리는 형편이었어. 그래서 여학교를 나온 후 여자 가정교사는 취직을 하여 그 수입으로 남자 가정교사의 학비를 도아 주었지. 그러는 동안에 두 사람은 어느 틈엔가 결혼도 채 못하고 부부처럼 생활을 하게 되었더란 말야』
『어머…』
은실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온당치 못한 일이었지. 그렇지만 두 사람은 모두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외로운 사람들이어서 그런 과오를 저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어. 청년이 졸업을 하기에는 아직 시일이 남았고, 여자 가정교사는 이미 사회인으로 취직하고 셋방을 얻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환경으로 해서 탈선이 된 것이었지』
『그래서 그 두 분은 결혼도 하지 않고 부부가 되었나요?』
물어보는 은실의 얼굴에는 날카로운 호기심이 번뜩이었다.
『부부가 된건 아니지. 청년은 그대로 가정교사 노릇을 하고 학교에 다니면서 여자 가정교사의 셋방살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만 있었으니까. 허지만 실질적으로는 부부가 된거나 마찬가지였지. 더욱이나 여자 가정교사는 결국 몇해 후에 아이까지 낳게 되었으니까.』
『어머…』
은실은 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두 분은 그 청년이 학교를 졸업한 후에 결혼을 했나요?』
『그렇게 되었어야 할일이었지. 그런데 일이란 항상 예측과는 다른 방향으로 빗나가게 마련이거든.』
『그럼 무슨 장애가 생겼군요?』
『그때는 장애였겠지만 알고 보면 장애가 아니었지. 그것은 모두가 그 청년의 마음 하나에 달려있던 일이었으니까』
『어떻게 된 일이었는데요?』
윤 사장은 한숨을 지었다.
『그 청년이 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가정교사로 있던 주인댁 사장(社長) 어른이 갑자기 뇌일혈로 세상을 뜨게 되었지. 그분은 우리나라에서 상당히 활동력을 가졌던 무역계의 중진으로 외국에 주로 일을 많이 벌려놓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후계자가 없는 형편 이었어』
『그분께서 자녀가 없으셨나요?』
『삼남매가 있었는데 큰딸이 내가 가르치던 여학생이었고 다음이 둘째딸로 아직 어리었고 세째가 아들이었는데 국민학교도 채 졸업을 못하고 세상을 떴었지. 그래서 그 댁에서는 갑자기 그 청년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제의를 했단 말야.』
『무슨 제의인데요?』
은실은 이제 호기심이 절정에 이른 듯 윤 사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즉, 그댁 맏딸과 결혼을 해서 주인어른대신 외국에 가서 일을 맡아 해달라는 것이었지.』
『그렇게야 어떻게…』
『물론이지, 그래서 그 청년도 거절을 했던 모양이야. 그러나 그 댁에서는 주인어른의 불행이 없었어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으니 부디 거절하지 말고 승낙해달라는 거였어. 그리고 그댁 맏달은 벌써부터 그 청년을 사모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