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이제와서 문화운동이니 활동이니 하는 말부터 김이 빠진 느김이며, 잊고에서도 문화운동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화사업으로 맞서 나가지 않으면 안될줄 안다. 「운동」과 「사업」은 단지 그 표현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내용과 방법이 다르고 그 조직이 다른 것이다. 문화활동에 있어서도 앞으로는 하나의 규모있는 「사업」으로 발전해 가지 않으면, 현대사회에서의 큰뜻을 가지지는 못할 것이다.
사색(思索)에도 벤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서서 다니고 행동하는 일이 중요한 거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앉아서 의논하고 토론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무슨 문화활동을 목표로 하는 그러한 장소가 마련되고 자면, 스스로 그 모임이 뚜렷한 성격을 맺지 못하는 수가 많다. 여기에도 『惡貨가 良貨를 _遂』하는 시장법칙(市場法則)이 작용하기 쉬운 것이다. 막상 그 모임을 끈기있게 끌고나갈 사람은 뒷전에 물러서기 마련이고 이상한 세력이 영향력과 지배력을 행하하게 마련인 것이다.
이런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특히 문화활동에 있어서는, 그 방면의 전문가의 위치와 의견이 다같이 중요시 될 수 있어야 한다. 돈과 권력만 있으면 안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황금만능의 사고방식을 경계해야 한다.
또한 서구(西歐)문화에 대한 태도도 상당히 중요한 것인줄 생각된다. 우리사회에서는 아직도 가톨릭은 서양의 종교인줄 알고 있다. 이렇게 잘못 인식하고 있는 이유는 누구보다 한국가톨릭 스스로에게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인도이 「그레이셔스」 추기경은 『가톨릭은 그 지방의 전통 문화에 접목(接木)되어 더 좋은 결실을 약속해 준다』고 하였다. 우리의 문화운동에 앞서 한 원칙과 같이 가톨릭 문화관(文化觀)을 밝혀둘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곧잘 제자신을 깊이 알지못하기 때문에 서양의 것을 끌어다가 스스로의 무지(無知)를 메우는 수가 많은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불찰은 가톨릭에 대한 오인(誤認)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니 참으로 송구스런 일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가톨릭이 서양의 종교라는 인상을 준 것은 이땅의 가톨릭 문화인 전체가 걸머져야 할 책임으로 통감할 일인줄 안다.
이런일로부터 시작하여 가톨릭 문화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착실한 방법이 짜여져야 한다. 종래와 같이 매사에 있어서 「아마추어」를 벗어나지 못해서는 격동하는 바깥사회와 대결해 갈수는 없는 것이다. 가령 책이나 신문 잡지를 박아내는데 있어서도 뒷받침이 허술하기 때문에 참, 땟물을 씻지못한 몰골을 하고서 세상에 나오고 있다. 이렇게 하고서 다른데 가서는 체면과 권위를 차리려 하고 있는 것은 이 문화운동의 절실한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한편에서만 쳐들고 나서서 무슨 일이 성사될 길은 없고 상하(上下)가 서로 무릎을 맞대고 조그만한 겨자씨 한알을 심어볼 정성이 아쉬운 것이다.
얼마전 「알지에」에서 세계의 개발도상에 있는 국가들이 모여서 국제경제회의를 가졌었는데 가소롭게도 정치적인 이용을 하는 축이 있어서 추태를 벌였었지만, 이의 결과로 「제3의세계」란 말이 탄생되었다. 「제3의세계」-물론 경제적인 여건이 그렇다는 뜻이겠지만, 우리는 기를 써서 이 「제3의세계」에 들어갔던(參席)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는 제3의세계에 살고 있다는 현실감을 져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제3이란 첫말을 떼버린다고 하더라도 현실(=世界)에 살고 있음을 각성해야 할 일인줄 안다. 공의회의 정신은 통털어서 말하면 『現代에 適應』해가는데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요안 23세의 「아죠르나멘또」(그는 이 말로 공의회의 정신을 대표한다고 밝혔었다)를 일본의 신문들이 번역한 말이다. 그 당시 가톨릭시보 편집실은 이태리인 시누에게 이 말의 이어(伊語) 본뜻을 물었더니, 그는 펄펄 뛰면서 『현대에이 적응이 아니라 「오늘」에의 적응입니다. 현대라고 하면, 멀고도 막연합니다』고 하던 일을 기억한다.
교회와 문화활동, 지난날과 비교해 볼 때 사치스럽고 과분할만큼 호조건이 갖춰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직도 아무런 동기조차 잡지 모샇고 있다면 과문의 소치라고 책망할 것인가?
姜若望(文筆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