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센타」는 지난 9月 29일부터 10月 9日까지 丙寅殉敎百週年記念事業會 主催로 殉敎劇인 金茶斗 作 「이름없는 꽃들」(5幕 8場)의 紀念公演을 가졌다.
專門劇團이 大衆을 相對로 天主敎關係의 創作宗敎劇을 公演하기는 韓國가톨릭史上 이번이 처음이라는 意味에서도 퍽 뜻있는 行事였다.
무대는 1835年頃 忠南內浦지방의 德山, 內浦지방은 1801年부터 天主敎박해로 피를 흘려오다가 最惡의 丙寅年에는 수십명이 모진 刑罰과 生埋葬을 당하는 등의 도륙으로 처참을 極했던 곳이었다.
그 무렵 德山縣에는 新興勢力인 安東金氏의 세도 그늘에서 방약무인의 횡포를 부리는 金進士일족이 있었다.
어늘날밤 前工曹判書 李家煥의 후예인 재운 형제가 金進士의 아들인 수도일당의 습격을 받아 死境에 처해 있는 것을 숨어 사는 敎友 박노인과 朴노인집에 피신해 있던 聖處女 아녜스의 간호로 살아나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덧 재운과 아녜스는 사랑하게 되고, 재운은 서울로 科擧보러 떠나게 된다.
그런데 평소부터 연정을 품고 있던 金進士의 아들 수동은 朴노인이 天主敎信者라는 약점을 가회로 아녜스를 손에 넣으려고 한다.
그에 대항하다가 처형을 당할 찰라 朴노인 내외와 아녜스는 장원급제로 암행어사가 되어 도랑온 재운에 의해 구출된다.
그러나 아녜스는 죽고, 재운은 관직을 버리고 죽음을 각오 天主敎徒가 된다는 이야기.
新人作家로서는 비교적 興味있고 짜임새 있게 이야기를 構成했다. 그러나 主人公 아녜스의 前歷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라든가, 재운이가 暗行御史란 高位職을 아무런 內的葛藤도 없이 내버리고, 天主敎徒가 된다든다 하는 것은 분명 이야기를 安易하게 處理하는 同時에 飛躍시키는 無理를 범했다. 作家는 歷史에 대해서 많은 知識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作品 속에서 作家의 歷史觀이 드러나질 않았다. 作家는 歷史的인 事實을 어떻게 「드라마」로 昇華시키느냐 하는 문제에 등한하지 않았는가 한다.
더구나 宗敎的인 문제들을 어덯게 作品 속에 深化시키느냐 하는 것에 더욱 소홀했다. 즉 宗敎劇의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聖化라든가, 神的인 것과 人間的인 것의 葛藤 宗敎的인 것과 比宗敎的인 것의 相衝 같은 것이 主人公들의 內面的苦惱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처럼 주인공들이 宗敎的으로 深化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는 극히 笑劇的인데로 흘렀고 흥미중심에서 맴돌았다. 동시에 혹독한 迫害 속에서 護敎하며 殉敎하는 當代의 人間像을 浮彫시키지 못했다.
그것은 演劇을 보는동안 觀客에게 宗敎的으로 순화되고 高揚된 感動을 일으키게 하지 못했다는 데서도 곧 알 수 있다. 따라서 作家는 단지 「가톨릭적 春香傳」을 만들었고 宗敎的인 事實을 빌어서 가장 凡俗한 風俗史劇을 그리는데 그치고 말았다. 노련한 演出(李源庚)은 미흡한 作品을 살렸으나 너무 「演劇의 재미」에 力点을 두었기 때문에 主題를 죽였다.
끝幕에서 아녜스에게 强烈한 宗敎的心魂을 불어넣었더라면 아녜스는 좀더 聖化되었을 것이고 「春香」이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意慾에 넘친 젊은 「드라마센타」는 團員들의 演技는 무대를 활기에 넘치게 했다. 그중에서도 金權(朴노인분) 朴은수(수동분), 金正哲(포석분), 安民洙(쇠돌이분)의 演技는 대단히 좋았으나, 崔文熙(아녜스분)의 演技가 좀 生硬했다. 崔文熙의 연기가 좀더 좋앗으면 극의 主題가 더 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裝置와 音樂은 좋았으나 照明에 흠이 있었다. 끝幕에서 아녜스가 昇天할 때 나타난 十字架는 너무 크게 「클로즈업」되었고, 여러가지 色彩가 들어가서 마치 童畵같아 엄숙성을 덜게 했다. 十字架를 單色으로, 멀고 작게 보이게 하고, 아녜스도 직접 나타나지 않고 幻影만이 비쳤으면 좋지 않았을까.
柳敏榮(筆者 연극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