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믿나이다』-6월 30일 교황은 장엄한 儀式가운데 기립하여 『우리는 믿나이다』라고 신경을 염했다. 그는 『나는 믿나이다』하면서도 온 교회의 신앙을 꼭 같이 표현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을 모든 신자들이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장엄한 행동에 모든 가톨릭신자들을 명확한 태도로 참여시키기 위해 『우리는 믿나이다』로 염하기를 더 좋아했다. 우리가 믿을때 같은 신앙을 가지는 많은 형제들이 거기에 함께 참여한다고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가 바다 앞에 있을때 시선을 먼저 그 넓은 바다를 향하게 되고 다음에 그 바다전체의 깊이를 상상한다면 하나의 새롭고도 몸에 스며드는 그 무엇을 느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하는 신앙행위가 수억의 믿는자들의 그것과 함께 한다고 意識할때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감동과 위안을 느낀다. 우리의 신경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다른 수백만의 사람들이라도 요소적인 조항은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이 『우리는 믿나이다』를 하나의 사실과 초대의 형식으로 다른 사람 앞에 선포하는 이는 인류의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신앙의 행위를 자랑삼아 서서염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고 또 촛대위에 두는 귀중한 광명으로 결코 자신을 위해 밝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장 근본적이요 필요한 은혜처럼 받았다. 우리는 겸손과 감사의 정으로 그것을 받은 것이다.
애덕에 있어 이토록 개방적이었던 교황 요한 23세가 그의 첫회칙 「베드로의 어좌에서」를 통해 진리의 인식을 권고하면서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하지 아니했다.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정신을 혼란케 하는 모든 악의 원인과 뿌리는 진리에 대한 무식이다. 무식뿐만이 아니요 때로는 진리에 대한 경멸과 경솔한 증오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누구나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모르면 사람답게 살수 없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이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필요한 확실성을 준다.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도 손으로도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기하학의 定理처럼 증명하지 못한다. 오직 우리는 많은 표적으로써 알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또한 영혼은 하느님이 착한마음을 가진자에게 주시는 광명을 온순히 받아들인다. 우리는 진리가 있는 거기에 하느님의 보증이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모든 신자가 아무리 겸손하고 교양이 적다할지라도 믿지 않는 가장 훌륭한 철학자들보다 자기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사실 얼마나 훌륭한 확실성인가! 우리의 아버지이신 성부 우리를 가르치고 죽음으로 죄를 이기기 위해 사람이 되시어 제대위의 제사 _____ 감실 안에 살으시고 우리 가슴속에 오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힘으로 우리를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시는 성신, 하느님의 선을 우리에게 갖다주는 교회, 하느님을 감당하는 가운데의 영원한 삶, 하느님으로부터 정화되고 아름답게 되고 복을 받은 피조물과 의 일치.
성아우구스띠노는 더욱 순진한 영혼을 도와주고 만족케 하고 또한 동시에 넘치는 조화와 한없는 깊이로 더 교양있는 자들의 정신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교적 교리의 이 재산을 감탄했다.
관상생활하는 영혼들은 교리의 美를 걸고 끝까지 탐구하지 못했으며 또 신약의 사실이 어떻게 구약에 예언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순명이 어떻게 인간의 불순에 응하며, 복음정신이 어떻게 세속의 정신에 반대되며 예수의 말씀이 어떻게 언제나 새롭고 적절한 것이 되는지 마지막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비사(秘事)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비유와 상징의 도움으로 언제나 신앙의 더 맛있는 지혜 속에서 진보할 수 있다. 한편 그것은 매우 주목해야할 사실로 진리에 증언한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교적 교리는 우리가 천주성삼에 대해서 말하거나 신인이신 성자위에 대해서 말하거나 혹은 하늘에도 계시고 동시에 모든 감실에도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말할때 처럼 처음 봐서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매우 어려운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진리에 대해서 모순을 지적해서 증명할 수 없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하나의 학문이요 또한 모든 학문의 여왕인 신학은 제역할을 다하며 또 모순의 형적을 더 깊은 신비로 없앤다. 우리는 이성에 수긍되는 학문과 진지한 증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 애호가의 인상이나 유행에 대한 견해 또는 현대사조의 요구에 무게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신앙의 선언문을 듣거나 읽음으로써 만은 부족하다. 이렇듯 빛나고 위로가 되는 진리로 언제나 자신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묵상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어려움을 아시는 교황께서 어려움을 명백히 하고 모든 애매한 것을 제거하기 위해 몇가지 점을 특히 강조 하셨다.
표현이 더 쉽고 단순할수록 진리도 더 숭고하고 명백하고 멋지다. 예컨대, 미사는 『제대위에 성사적으로 현존케하는 갈바리아의 제사』이다. 또 『사제로부터 축성된 떡과 술은 하늘에서 영광스럽게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본질적인 것을 말해줌으로써 믿는 이의 영혼은 거기서 깊은 감미를 느끼게 된다. 일치의 희망은 명확하고 예리하고 주의 깊게 표현되었다. 즉 유일한 교회와 아직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그리스도신자들은 언젠가 한 목자 밑에 한 우리로 모일 것이다. 「웁살라」에서 교회일치사무국장인 유진 카슨 블레이크 박사가 교황의 이 선언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솔직히 그러나 투철하게 대답했다.
즉 『내 생각에는 그것이 가톨릭교회에서 잘 알려진 입장을 재확인한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신앙의 해는 「로마」 교황의 신앙의 이 장엄하고 열열하고 명확한 선언으로 더 잘 끝마칠 수 있었다.
(「옷셀바또레·로마노」에서)
샤르·봐에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