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性해방은 또한 人間의 性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성들이 모든 분야에서 동등권을 주장함으로써 가족體制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만아니라 性발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소년범죄 기타 社會惡이 직장을 가지지 않은 어머니의 자녀들보다 직장을 가진 어머니의 자녀들에게 더 많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직장을 가진 많은 어머니들은 집을 떠날 때에도 자녀들을 잘 보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를 받든 안받든 어머니가 밖에서 일할 때는 밖의 여러가지 어려운 사정으로 과잉보호의 악영향을 지양할 수 있기 때문에 자녀의 性발전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남편인 아버지가 더 많이 家事에 관심을 갖도록 압력을 가하게 된다. 일하는 어머니들은 일반적으로 견문이 넓어져서 개성이 참신하고 활동적이므로 자녀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자녀들은 창의성과 열의와 실천성을 보여주는 어머니를 사랑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가 자녀와 가정을 등한히 하고 너무나 물질적이되어 여성의 섬세한 감정과 유순함을 잃게 될 위험성도 있지만, 대체로 일하는 어머니로 표현되는 여성의 해방은 자녀의 성발전을 저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도움을 주는 건전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여성해방의 문화현상은 직접적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성관계에 작용한다. 종전에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른 기준으로 二元的 性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자가 자기편에서 性的욕구를 표시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 됐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정이 많이 달라져서 二元的상태는 개선되고 있다.
이런 二元的상태가 옳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 二元性을 적절히 적용하여 유지시켜야 한다. 여성을 남성의 장식품처럼 생각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존주의 역시 현대인의 性에 작용하고 있다. 구라파에서 오랫동안 위력을 떨친 이주의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얼마되지 않지만 개체의 의지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실존주의의 극단적 표현은 어떤 개인이 자신이 외(예컨데 사회, 신, 그리고 자신의 생리까지라도)의 어떤 힘의 영향을 받는다면 멸시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절대성이나 원리를 배격하고 전통에 대한 개인의 느낌과 실천적 판단만을 강조한다.
따라서 구시대의 과도한 형식적 법률적인 윤리의 제재력을 시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존주의는 윤리의 상대성을 조장하고 규정된 윤리규범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20세기의 性的 태도나 경향을 변천케 한 가장 큰 힘은 실천과학의 발전과 전파라 하겠다. 예컨데 사회학 사회심리학 인류학 심리학 및 「매스메디아」등이다. 이런 학문은 구체적인 인간의 처신을 원리에 의한 영역에서 보다 통계에 의한 귀납으로 연구되고 있다.
20여년전 킨제이 박사의 인간의성에 관한 연구는 그 좋은 예다. 인간의 性에 대해서 전통적으로 대중이나 위대한 사변가들이 말한 것을 따르지 않고 그는 주의 깊게 5천3백명의 남자와 5천9백40명의 여자의 처신을 연구해서 어떤 결론을 얻었던 것이다. 킨제이를 포함한 소수의 실천 과학자들은 자기들의 통계나 방법론으로 지탱할 수없는 한계를 넘어서는 결론을 지우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인간의 性에 대해 너무 용한 태도를 보여준다. 결혼전 성교가 결혼생활을 원활히 하는데 도움이 된다든지 하는 것 등이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특히 가톨릭 학생들은 이런 연구문을 처음으로 읽고는 자기들이 종교교육으로 배운 청소년의 순결성이 비과학적이라고 결론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학생들은 자신들을 종교의 희생물이라 느껴 종교는 요술이나 손장난만큼도 신빙성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그들은 자기부모들이 과학적 진리를 말해 주는 대신 종교적 우화로 자신들을 농락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많은 부모들이나 종교인들이 실천과학의 결함을 지적하고 종교나 윤리가 냉철한 과학적 분석과 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만큼 유능하진 못하기 때문에 젊은 대학생들은 그들의 그만한 지혜로 쉽사리 과학자들의 능변과 표면적 조작을 믿게 된다. 이런 사실들은 젊은 사람들을 상대주의와 경험주의에 대해 표류케 하고 만다. 신학은 실천적이고 세속적인 학문의 폭발적발전과 화평을 맺는데 실패하고 있다.
계속적인 연구와 제2차 「바티깐」 공의회로 조금은 나아졌다고 하지만 신학은 아직도 실험과학에서 너무나 동떨어져있으며 추상적으로 실생활과 관계없이 초연히 떨어져 있을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