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宗敎觀(종교관)] ⑭ 生死(생사)의 境界(경계)를 抹消(말소)하는 機能(기능)
괴로운 일 갑갑한 일있으면「로마」書(서)를 默讀(묵독)
발행일1968-08-18 [제631호, 4면]
宗敎를 否認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앙을 가진 것도 아닌 自身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一定한 宗敎觀을 갖지 못한 것이 分明하다. 宗敎觀이 없으면 宗敎觀을 얘기한다는 것은 매우 合當치 못한 일이 되겠으나 宗敎에 대해서 필자 나름으로 생각하는 바를 적으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붓을 들었다.
宗敎書籍으로 필자가 제일처음 愛讚한 것은 「로마」書였다. 天性이 勤하지 못해서 新舊約을 合本한 聖書를 讀破할 勇氣는 도저히 내지 못하고 新約만이라도 읽으려고 했는데 첫머리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家系를 보고는 또 勇氣를잃고 말았다. 그래서 마음 내키는 대로 뒤적거리다가 관심을 갖게된 것이 「로마」書였다.
그렇게 힘찬 文章은 일찌기 보지 못했다. 文章에 끌려 읽어가다 보니 그 밑바닥에 흐르는 사도 바울의 不動의 信仰에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다. 보통 말하는 信念과 信仰의 다른 次元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고 使命에사는 인간의 眞面目에 感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로마」書의 注解書를 얻어 보았는데 理解를 돕는 事項은 많이 알게 되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억지 해석이 따라 붙어 필자 나름대로 가졌던 처음의 映像이 흐려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다음부터는 注解書는 필요한 대목만 보기로 하고 바울의 서한은 다 읽어 보았다. 모두 迫力과 信仰이 넘치는 大文章이었으나 역시 「로마」書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것이 契機가 되어 福音書도 읽고 使徒行傳도 읽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黙示錄은 읽지 못했고 舊約은 全然 보지 못했다. 책을 펴고 몇줄 읽다가도 곧 싫증이 나버리는 것은 역시 天性의 탓으로 돌리는 수밖에 없겠다. 다만 詩篇만은 愛讀하고 있다.
이리하여 筆者는 聖書를 斷片的으로 밖에 읽지 못했고 知識도 별로 없다. 그러나 처음으로 「로마」書를 耽讀한 28年前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괴로운 일 갑갑한 일이 있으면 흔히 「로마」書를 펴들고 黙讀한다. 바울의 高邁한 人品과 無구한 信仰에 스스로 慰安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信仰人의 姿勢가 못된다는 것은 自身도 잘 알고있다. 다만 信仰의 世界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을 뿐이다. 佛敎解說書와 佛經도 가끔 펼쳐보았다.
先輩중에 法華經을 極口薦擧하는분이 있어 宗教란 결국 人間本然 지루한 것을 참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다시한번 되풀이했으나 마음속에 접히는 것이 없었다. 數年前에 青潭스님이 주신 西山大師의 禪家龜감 만은 지금도 愛讀하고 있다. 大乘起信論 外에는 佛敎思想은 이처럼 簡明直절하게 說明한 책도 드물지 않을까 한다.
이와 같이 宗敎에 대해서 確固한 態度는 決定되지 않았으나 宗敎的인 것을 向해서 接近하여 가고 있는 것이 現在의 自身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언젠가 報答할 날이 있을 것을 느끼고 있다. 人類史에서 宗敎가 맡은 偉大한 役割은 充分히 認識하고 있다. 西洋史와 기독교 또 오늘날 서양사회와 기독교의 不可分의 관계를 생각하면 自明한일이 西洋史의 척柱가 基督敎라면 現琢美社會의 기둥 역시 基督敎다.
몇해를 영국에서 보낸 일이 있는데 실지로 敎會에 나가는 사람의 數는 예전보다 줄어 70% 未滿이라고 하지마는 信者나 非信者나 基督敎倫理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自他가 共認하고 또 그것이 社會를 지탱하는 기둥인 것도 알았다.
우리 民族의 盛衰도 宗敎와 깊은 關聯이 있는 것 같다. 佛敎가 國敎로 행세하던 新羅·高麗와 宗敎가 抹殺된 李廟의 社會相을 對比해 보면 이 理敎는 뚜렷해진다. 歐亞를 征服한 大蒙古族과 39년 동안 抗爭해낸 끈기도 宗敎에서 울어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의 姿勢로 돌아가게 하고 生과 死의 境界線을 抹消해주는 機能이라고 가끔 생각하는 일이 있다. 이런 機能이 없어진 人間은 實利 外에 執着할것이 없고 그것이 度를 넘으면 手段方法을 가리지 않는 術數도 서슴치 않게 될 것이다. 李朝以來의 無宗敎社會의 悲劇은 여기서 나온 것이 아닌가 筆者는 이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