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회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못받기 때문에 나쁜짓을 한다.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개혁해야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공의회의 지시를 실천에 옮기게 할 수 있겠는가? 이점에 대해 이야기하기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영신생활의 단계」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①영신생활의 최하단계인 대죄는 지극히 이기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 경우, 기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②대죄 속에 살면서도 통회의 마음이며 떠올라 기구하기 시작한다. ③이기적인 태도를 버리고 대죄에서부터 벗어난다. ④대죄에서 정화단계를 끝마친다. ⑤고의로 범한 소죄에서부터 벗어난다. ⑥소죄에서 벗어나는 정화과정을 끝마친다. ⑦성실이 각자에게 친히 지도하는 「빛나는 생활」이 시작된다. ⑧완전한 자기포기와 단순함으로 하느님과 적극적이며 일치하는 생활이 온다. ⑨외적인 실패를 통한 수동적인 정화를 겪는다. ⑩비로소 수동적인 일치에 도달 한다.
▲대화=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애덕을 통한 일치다. 이웃은 내가 스스로 만들기전엔 생겨지지 않는다. 또한 이웃은 이성(異性)이라기 보다는 「사람」이다. 크리스찬으로서의 인격을 들어나게 해주는 이웃이야말로 참된 이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이웃 간의 참다운 애덕을 무엇보다 중시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체험하기 직전, 바로 제자상호간의 관계를 위해 기구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화는 논리적으로 공부할 대상이 아니다. 마음 안에서 부터 우러나와야 하고 우러나온 무엇을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는 사상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며 인간은 오직 혼자서 착한 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울타리를 쌓아놓고 자신을 보호하려 들면서 대화를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다.
▲원만한 일치=우리는 인격을 가진 개인이며 공동체다. 어떤 의미에선 성부처럼 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이며 셋인 하느님과 비슷하게, 개인이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크리스찬적 생활의 최고의 표현을 대화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화하기 위해선 진실부터 찾을 것이 아니라, 사랑부터 찾아야 한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격려할 줄부터 알아야한다.
◈ 제6회
▲크리스찬적 공동체=우리는 순례단이며 이국(異國)에서 본향을 바라본다. 그러나 우리는 낙관적인 백성이고 희망과 기쁨에 찬 백성이다. 교회와 더불어 공동체로서 우리는 흠숭의 예인 미사를 같이 봉헌한다. 축일때는 온 본당신자가 가족처럼 지내는 사랑의 공동체다. 본당은 많은 「아들들」을 낳아주는 것이 아니라, 많은 「형제들」을 낳아서 서로 사랑하며 격려하는 기쁨에 찬 공동체가 되게 한다.
▲교구를 쇄신하는 책임은 주교에게 있고, 본당은 신부에게 수도원은 원장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으뜸이 도와주고 협조해야하지만 「이니시아티브」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주교가 원해도 본당신부가 원치 않으면 본당은 쇄신될 수가 없으므로,
모든 쇄신은 「순명」의 원칙하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상은 아랫사람의 진실된 의견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어떤 부문에 있어선 자기보다 아랫사람이 훨씬 잘 알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