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대면하고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이에 무관심 할 수 없다. 인간이 죽음에 대하여 심적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죽은 후 우리 육체가 나날이 썩어져간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아주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자기가 완전히 파괴되고 결정적으로 소멸되는 것을 싫어하며 될 수만 있다면 이를 거부하려는 심정은 떳떳한 것이다.
인간이 죽음에 대항하려는 까닭은, 인간이 예사로운 물질로 환원(還元)될 수 없는 영원성(永遠性)의 싹(배 芽)을 자체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이 여러가지로 발달되었으나 인간의 이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지 못하고 있다. 설사, 인지(人知)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壽命)이 약간 연장되더라도, 우리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후세에라도 더 살고 싶다는 소원이 채워지지 않은채 우리는 죽음에 대면한다.
이 죽음의 신비를 풀어보고자 여러 사람이 여러가지 모양으로 해설을 붙여 보았으나, 다들 실패했다. 오직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의 계시를 토대로 하여 믿을만한 해답을 한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현세의 어떠한 비애(悲哀)도 간섭할 수 없는 행복에로 초대하기 위함이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모면하였을 죽음도 언젠가는 정복된다고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르친다. 즉 제 잘못으로 파괴된 인간을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구세주께서 그가 가졌던 온전한 상태에로 회복시켜 주실 때에 우리는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육신이 겨랍된 온전한 인간이 죽음과 부패를 초월하여 영원한 신적(神的) 생명에 끝없이 참여하도록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께로 부르셨고 또 부르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에 승리하셨고 따라서 당신의 죽음으로써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신 것이다.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진지하게 사색하는 이들은 누구나 이 확고한 논증에 근거를 둔 신앙에서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시켜 주는 해답을 발견한다. 동시에 이 신앙은 하느님 곁에서 참된 생명을 누리고 있는 이미 떠난 사랑하는 형제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나 그들과 더불어 사랑의 교류를 할 수 있게 된다는 희망을 인간이 가지게 된다고 가르친다. (현대세계헌장 18 참조)
천상의 영광중에 있는 형제들 혹은 죽은 후 아직 정화중에 있는 형제들과의 생활한 교류에 대한 신앙이, 여정(旅程)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안에 초대(初代)로부터 견지(堅持) 되어왔다. (교회헌장 51 참조)
이것이 바로 계시를 토대로 하여 인간의 신비, 죽음의 신비에 대하여, 믿는 이들의 눈을 밝혀주는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교리다.
따라서 인간의 고통과 죽음의 신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해명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서 이를 생각할 때 우리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 (현대세계헌장 22 참조)
현세 생명에서 내세(來世)의 생명에로 지나가는 「빠스카」(유越)의 구실을 하는 죽음 즉 종말(終末 ESKATOS)에 대한 희망이 인간의 현세생활을 무시하거나 그 중요성을 약화시키지나 않을가 하고 걱정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종말 즉 내세와의 연결이 새로운 동기가 되어 오히려 지상생활을 뜻있게 해나가도록 뒷받침 해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인생문제에 대하여, 하느님께 기초를 두지 않고, 또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지니지 않는 무신론적 사고방식과 유물론적(唯物論的) 세계관에서는, 오늘날 자주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이 너무나 무시되며 생(生)과 사(死) 죄(罪)와 고(苦)의 수수께끼가 도무지 풀리지 않는 결과로 절망에 빠지고 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현대세계헌장 21참조)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길을 따르면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거룩한 것으로 변하고 새로운 뜻을 지니게 된ㄷ. (현대세계헌장 22 참조) 즉 인간의 존엄성이 정당하게 평가되고 인류가 한 가족을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며, 이를 위한 인간 본성에서 오는 열망과 우리가 바치는 노력이 이미 정화(淨化)되어 영원히 실재(實在)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현대세계헌장 39 참조)
한공렬(主敎 · 全州敎區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