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25) <第二話(제2화)> 榮光(영광)의 敗北(패북) ⑪
발행일1968-08-25 [제632호, 4면]
『글쎄. 만족이라고 할가 무엇이라고 할가 마음에 품은 야망을 펴게 되었으니까. 처음에는 그저 정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세월을 보냈지. 그렇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어렴풋이 피어오르는 고민을 누룰수가 없었던 모양이야.』
『왜요?』
『배신을 한 여자 가정교사와 거기서 낳은 딸을 어떻게 완전히 잊어 버릴 수가 있겠어』
『그야 벌써 큰 야망을 위해서 내어버린 조그만 일 아니었나요?』
은실은 제법 앙큼스러운 말을 했으나 윤 사장은 그저 한숨을 내어 쉴 뿐이었다.
『배신을 할때에는 그 배신을 합리화시키려고 그렇게 생각을 했겠지. 그렇지마는 마음속의 양심은 결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거야. 그래도 처음 배신할 때부터 이 십년동안은 일이 순조롭게 잘되어가는 까닭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대로 지낼 수가 있었지. 말하자면 승자(勝者)의 영광이라고나 할가. 나는 이겼다. 승리를 위해서 다소의 희생자가 나는것은 할 수없는 일이아니냐. 그 희생자 때문에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마치 전쟁에 승리한 영웅이 적군의 전사자로 해서 고민하는 것과 같은 넌센스에 불과한 일이다. 아아, 나는 승리했다. 그러니까 영웅이다. 누가 나에게 감히 무어라고 항의를 할 수 있겠느냐. 만일 나에게 그만한 용기와 행동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만한 영광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때나 승리의 영광에는 으례 희생자가 따르는 법이며, 그 희생자야 말로 가엾은 패배자인 것이다. 그 청년은 이런 생각으로 마음속의 고민을 누르고 달래며 이십년을 살아온 것인지 모르지.』
이야기하는 윤 사장의 입가에는 차거운 웃음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또 길게 한숨을 내어쉬었다. 그리고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씻었다. 송글 송글 주름진 이마와 뺨전체에 땀이 솟아있었다. 그리고는 얼굴에 검은 그늘이 지고 숨이 가빠오는 것 같있다.
『사장님, 피곤하시지 않으십니까?』
은실은 놀라서 근심스럽게 윤 사장에게 물었다.
『응, 몹시 피곤해. 온몸이 쑤시고 눈앞이 캄캄하게 어두어 오는 것 같아. 그렇지만 조금 지나면 괜찮을 거야. 나의 건강은 늘 이 모양이니까 인제는 습판이 되어서 아무렇지도 않아.』
윤 사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하며 몸을 조금 옆으로 뉘어서 반쯤 들어 눕는 자세를 취하였다.
『정 괴로우시면 말씀은 두었다가 나중에 하시지오.』
은실은 몹시 안타까운 눈치었다.
『아냐. 그럴 시간이 없어 오늘 이 시각에 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내일이라는 날이 나에게 꼭 있을는지 그것조차 기약하기 힘드는 처지거든.』
『원 사장님도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은실은 웃었다. 윤 사장도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서글픈 웃음이었다.
『미스·양?』
윤 사장은 은근히 은실을 불렀다.
『네?』
『미스·양은 지금 내가 이야기한 그 청년이 대단히 못마땅하겠지?』
『글쎄요?』
『그렇지만 일은 제절로 해결되고 말았어. 이럴테면 사필귀정이지.』
『네?』
『이십년이 지나서부터 그 청년의 눈부신 승리의 탑은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한 거야.』
『무너지다니오?』
『먼저 그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지. 열병으로 십여일 앓다가 그만 허망하게 죽어버린 거야. 그러구 그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도 같은 열병으로 이어서 세상을 떠났어.』
『그럼 외국에서 홀몸이 된 셈이네요?』
『그것뿐만이 아니야. 그 청년자신도 마침내 불치의병이 생기게 되었단 말야. 그렇게 되니 그의 야망이나 승리의 영광도 하루아침에 모래로 쌓은 탑처럼 와르르 허물어지게 된 거란 말야.』
『어머나!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병을 고쳐보려고 애를 썼지. 온갖 현대의술을 총동원해서 건강회복에 노력을 했단말야. 그러니까 무너지는 승리의 탑을 지키려고 끝까지 투쟁을 한셈이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헛수고였지. 승리의 영광은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청년은 미처 몰랐던거야. 승리라는 것은 잠시 우리 눈에 비치는 공중누각에 지나지 않는거야. 그러니까 야망과 승리에 도취하는 사람은 헛된 순간을 잡으려고 애를 쓰다가 저 스스로 너머지는 어리석은 사람에 불과한 거야』
『그래서 그 청년은 어떻게 되었어요?』
『허허허허…』
갑자기 윤 사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지는 힘없고 속이빈 웃음이었다.
『미스·양, 청년이라니. 청년은 언제까지나 청년인가? 그 청년도 이제는 머리에 서리가 덮이기 시작하는 노년에 접어들었단 말야.
거기다가 가족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자신마저 불치의 병으로 내일이 없는 몸이니 그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는 생각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그래 병은 영영 고치지 못했나요?』
『그렇게 되면 그에게 이미 종언이 다가온 거지. 병이 나올리가 있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하는 수밖에 없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그는 비로소 맑은 정신이 들었지. 사람이란 참으로 어리석어서 한쪽으로 가기 시작하면 끝간데 까지 가기전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법이거든. 그 사람도 끝간데 까지 가서야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온거야』
『제 정신으로 돌아오다니오?』
『승리자가 자기의 승리로 해서 희생된 사람에 대한 속죄를 생각한 거지. 말하자면 뻔뻔스럽고 주제넘은 생각이지. 그렇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모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