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명」이란 회칙은 일찌기 약속되었던 회칙이요, 산아조절에 관하여 초조히 기다리던 대답이다. 이미 요한 23세가 1963년 3월에 인구문제와 가정 및 산아문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특별위원회를 설립하였고 바오로 6세도 이 위원회를 확대하였다. 이 위원회의 연구를 기다리며 교황은 1964년 6월 23일, 1965년 3월 27일, 1966년 10월 29일에 이 문제에 대하여 머지않아 무슨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였었다. 1966년 10월 30일에는 이 위원회의 연구결과가 결정적인 것이 못된다고 말하였다. 이유는 문제자체가 교리뿐 아니라 사목 내지 사회적 여러 문제 외 결부되어 있으므로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회칙 제6항에서 교황은 이 위원회의 결론들은 자신이 스스로 이 문제를 검토해야할 의무에서 면제해 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이 위원회 안에서 윤리 원칙 설명의 의견통일을 보지 못하였고 더구나 문제해결의 방법이 교회의 교도권으로 항구히 가르쳐 오던 도덕율에서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여러 대륙에서 이름난 학자들로 구성되었으며 4개 분과로 나뉘어 있다. 수도신부, 재속신부 평신자들로 구성된 신학자 분과와 의사들과 전문가들의 분과와, 인구문제전문가들의 분과와 대부분 영성·사랑·성(性)문제에 있어서 많은 경험을 가진 의사들로 구성된 부부들의 분과로 나뉘어 있다. 취급되는 문제가 특히 윤리에 관한 것이므로 신학자들의 분과가 지도적 역할을 하였을 것은 명백한 일이다. 다른 분들도 물론 자주성을 유지하였지만 많은 점에 있어서 자문 역할을 하였다.
이 위원회의 결론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내려졌지만 그 신학자들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 못했었다. 소수의 신학자들은 지금까지의 교도권이 가르쳐 온 내용을 고수하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나 다수의 신학자들은 같은 교도권의 혁신과 지속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외적 사고방식의 차이뿐이 아니라 보다 깊은 분열상을 보였던 것이다. 이 다수의 신학자들이 자기들끼리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결국은 소수의 신학자들의 통일된 의견을 뒤엎을 아무런 이유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전통 고수의 신학자들의 수가 소수였다는데서 교황 자신의 책임감은 가중되었다. 교황 자신도 7월 31일에 이 책임이 적지 않은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고 솔직한 심정을 신자들 앞에서 고백하였다.
일을 맡았던 신학자들이 4년이나 걸려서 내놓았다는 결론이 보잘것 없는 것이 되고 말았으므로 교황은 스스로 많이 듣고 많이 읽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직접 무슨 결론을 내려야 했었다. 여기서 그는 열심히 또 오래 천주성신께 기도하였다. 그는 한때 『시대적 여론에 동의할 것인가? 아니면 현대사회가 어렵게 받아들일 자신의 의견을 고수할 것인가? 그렇다면 멋대로 부부생활을 지나치게 괴롭히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하는 「딜렘마」에 빠져 몇번이나 회칙 발표를 주저하였다고 7월 31일 담화에서 숨김없이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노력을 다한 후에 하느님의 은총을 힙입어 이런 회칙을 발표하며 그 내용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회칙은 발표되어 가톨릭신자들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이제 이 회칙을 깊이 연구하고 교황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힘껏 그 가르침에 충실해야 하겠다.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선의의 부부를 괴롭히려는 회칙이 아니고 오직 부부와 가정과 국가와 인류세계에 참된 행복을 주기 위하여 정신적인 많은 고통을 겪은 회칙임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계속)
金南洙(神博·CCK사무국장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