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界平信者大會에 關하여는 本紙이 社說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代表들의 紙上發言要旨發表, 會議內容 그리고 大會開幕으로부터(10月 11日) 敎皇 바오로 6世와 各國代表主敎의 合同미사집전(15日) 우리나라 代表의 活躍相(李太載 博士 投稿) 大會 決議文 採擇(10월 18日)에 이르기까지 比較的 상세히 報道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本紙를 通하여 이미 發表된 內容에 對하여는 될 수 있는대로 再論하지 말고 이번 大會에 우리나라 代表의 末席에 끼어 參席한 한 사람으로서 느낀 바 몇가지 所感을 적어보고자 한다.
먼저 나는 이번 大會에 參席할 수 있는 機會를 갖게되었다는 事實과 나의 「人生行路에 있어서의 天主의 百姓」으로서 배운 바가 많았다는 점에서 이번 大會에의 參席은 적어도 나의 人生에 있어서 最大의 榮光스러운 8日間이었다고 생각한다. 特히 나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全世界에서 아마도 가장 영세한 나이가 어린 사람(1962년 부활절때)이 이런 大會에 나가게 되었음을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럴수록 나는 앞으로의 나의 信仰生活에 있어서 나 自身부터 刷新하고 나의 주어진 諸與件 속에서 모든 사람의 경제적 · 사회적 · 文化的 · 敎育的 나아가서는 영신적인 完全한 發展을 가져올 수 있도록 熱心히 그리고 더욱 착하게 살기를 다시한번 굳게 다짐하는 바이다.
大會參觀所感을 몇가지 추려보면 우리 代表團의 構成에 있어서 19名의 代表中 8名의 女性代表가 參席하여 우리의 아름다운 韓服차림이 世界의 「카메라」 속에 가장 많이 찍혀졌음을 생각할 때 會議場 안에서의 權威있는 發言을 通한 活躍은 勿論 會議場 밖에서이 人氣는 「바티깐」의 古典美를 더욱 황활하게 한 바 있었다. 團長 柳洪烈 博士와 副團長 李太載 博士의 細心한 指導 아래 우리 韓國代表團은 2次에 걸쳐 夜間會議를 열어 各分科委員會의 進行에 萬全을 期하였으며 또한 2次에 걸쳐 黃 主敎님 집전하에 우리나라말로 미사를 올렸다. 구라파와 北美를 除外한 亞細亞, 아프리카, 그리고 南美地域 代表團中에서는 아마도 내가 보기에는 우리 代表團이 가장 活潑한 움직임을 하였다고 본다.
그것은 우리 代表中 多數가 歐美서 留學中, 現地서 合流했는데 이분들이 歐美의 著名한 代表들과 이미 親熟했었던 것이 動機인듯 하다.
특히 이번 大會에서 「로마」에 오래동안 계셨던 朴 神父님(新任 가톨릭時報 主幹)과 任珍昌 누가씨(그레고리안 大學校에서 經濟學 博士學位 곧 수여 예정 후보자)의 韓國代表들을 爲한 諸般事前手配는 우리 代表들로 하여금 그다지도 活潑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그 基盤을 닦아주었다.
우리 代表들은 會議가 끝나는 10月 18日 밤에 「로마」 주재 韓國大使관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동시에 이번 大會에 관한 여러가지 意見을 나누기도 했다.
아침 8時부터 저녁 12時까지의 8日間의 會議에 약간 지친 우리 代表들도 大使관 직원 및 家族들과 같이 한자리에 모였을 땐 그동안의 努力이 한층 더 보람있게 느껴졌다. 우리 代表團은 그날밤 團長 숙소에 別途로 모여 앞으로 한국 主敎會議와 가톨릭時報를 通해 이번 大會의 全般的인 會議進行 경과에 대하여 報告 또는 報道할 責任을 지니고 잇음을 再確認하고 各分科委員會에 參席한 代表들이 責任 맡고 종합 報告書를 作成하여 11月末日까지 李太載 博士에게 原稿를 우송키로 하고 그 最終報告書 作成은 團長 및 副團長에게 一任키로 하고 18日 저녁 12時에 各各 作別의 人事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날 19日 아침 「로마」를 떠나 22日에 귀국했다.
朴熙섭(혐동교육연구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