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世紀(세기) 作家(작가)들 ② 루이지 삐란델로
現實(현실)과 虛構(허구)와의 交錯(교착)
作家(작가)는 神(신)이 요구할 解明(해명)을 미리 試圖(시도)
傳道書(전도서) 연상케 하는 虛無(허무)와 풍자
人間(인간)의 苦痛(고통)은 神(신)의 聖事(성사)
알찬 短篇(단편) 「戰爭(전쟁)」 ……빵처럼 쪼갤 수 없는 부모의 사랑
劇作家이자 小說家요 詩人인 「루이지 삐란델로」는 20世紀 이탈리아 문단의 重鎭의 한 사람이다. 「시시리」섬에서 태어난 그는 1936년에 노벨 文學賞을 받았다. 제1차 대전 후 희곡 「作者를 찾는 여섯 사람의 등장인물」을 발표하여 세계적 작가가 되었다. 풍자적이면서도 허무적인 그의 喜劇은 戰後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작품에서 현실과 虛構와의 交錯 속에 特異한 성격 여섯을 투입하여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전개한 그는 다음 작품 「옛날과 같이, 옛날보다 더 잘」에서는 허구가 현실을 뒤덮고 幻影이 현실을 否定하는 현대생활의 기형성을 呈示하였다. 「당신뜻에 맡기다」에서는 방관자가 보는 현실과 당사자가 체험하는 현실과의 乘離를, 逆說的으로 생명의 本能과 생활감정과의 對立으로서 묘사하였다.
본능이 내용이라면 생활감정은 형식이요, 이 내용과 형식과의 相克이 인간에게 비극이 되고 희극이 되는 것이다.
삐란델로는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 인생은 다만 일련의 幻影으로 구성되었고 사람들은 아무것도(진리까지도) 확신할 수 없고 현실의 實存은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厭世觀을 投射시켰다.
그러나 그는 표면상 무의미해 보이는 이 실존의 그물에 얽혀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동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그의 이러한 作品世界는 警句體를 구사학여 實存問題를 旋的으로 다룬 구약 傳道書의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한 말을 연상케 한다. 인간이 좀더 잘 살아 보려고 발버둥쳐도 별 수 없고 결국 인생은 無常하다는 것이 전도서의 主調이기는 하지만 神을 두려워 함은 지혜로운 일이라고 했다. 즉 神만은 헛될 수 없는 것이다. (헛되다면 神이 아니니까) 『神은 이 모든 일로 네게 해명을 요구하리라는 것을 알라』고 했다. 作家는 神이 요구할 이 「解明」을 미리 시도해 볼 수도 있다.
삐란델로의 短篇 「戰爭」은 올(絲條)이 밴 알찬 작품으로서, 개인과 국가의 역사, 사람의 성격과 현실과의 照應關係를 示唆해 준다. 그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야간급행으로 「로마」를 떠난 여객들은 「파브리아노」라는 작은 시골역에서 새벽까지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술모나」에서 幹線과 접선되는 舊式區間列車로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동틀 무렵 다섯 사람의 승객이 밤을 새운 通風이 좋지못한 2등 객차에 중년부부가 올라왔다.
몸집이 肥大한 부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뭐가 서러운지 훌쩍인다. 얼굴이 창백하고 허약해 보이는 남편이 자기 아내가 이렇듯 悲嘆에 잠겨 있는 것은 『戰爭이 자기네 외아들을 빼앗아가려 하기 때문이다』고 다른 승객들에게 설명한다. 시골집까지 정리하고 「로마」로 나와 모든 희망을 걸고 공부시켜온 외아들이 6개월 이내에 一線에 보애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軍에 志願入隊하였었는데, 갑자기 사흘 안에 一線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面會와 달라는 電報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승객들은 이 중년부부에 별로 동정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뚱뚱한 부인은 그것이 더욱 못마땅해 몸을 틀며 이따금 짐승처럼 괴상한 신음소리를 내곤 했다.
한 사람이 입을 열어, 자기 아들은 戰爭 첫날부터 戰線에 나갔으며, 부상으로 두번이나 後退되었다가 세번째로 一線에 나가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또 한 사람은 두 아들과 세 조카를 一線에 보냈다고 말했다. 그 얼굴이 창백한 남편이 자기네 경우는 외아들이라고 抗辯한다. 두 아들과 세 조카를 싸움터에 보낸 사람이 대답했다. 『아들에 대한 사랑은 외동인 경우나 여럿인 경우나 마찬가집니다. 그 사랑은 빵처럼 조개어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이거나 열이거나 똑같은 사랑을 기울이는 것이 부모입니다. 』
또 두 사람은 아들이 戰死한 경우에 서로 상대편의 처지가 낫다고 談論한다. 이 때 다른 승객 - 肥滿하고 精力的인 老人이 입을 연다.
『…우리의 아들들은 태어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태어났고, 또 날 때 우리의 생명을 취해 태어났어요.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에게 속했지, 그들이 우리에게 속한 것은 아니예요 … 그들은 우리가 그 나이였을 때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요.
처녀, 담배, 환상, 유행의 새 넥타이… 국가, 그렇소, 국가를 가지고 있소. 그들이 국가를 생각하는 건 당연하지요. 차라리 인생이 추한 면을 모르고 꽃다운 나이에 조국을 위해 행복되이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내 아들은 자기가 바라던 최선의 방법으로 생애를 끝막는 데 만족하면서 죽는다는 소식을 전해왔지요. 내가 아들의 전사를 슬퍼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어느덧 조용해졌던 그 뚱뚱한 부인이 불쑥 물었다.
『그러면 댁의 아드님은 정말 죽었단 말입니까?』 뜻밖의 질문에 노인은 어쩧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부인의 얼굴을 쳐다본다. 이윽고 老人은 자기 아들이 참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實感한다. 그리고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
우리의 이 作品에서 「人間의 苦痛」이라는 默想 테마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의 환경을 감옥으로 만들고 그 壁에 헛되이 자기 머리를 부딛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리스도 신자로서 신앙의 여過過程을 거칠 때 고통을 「神의 聖事」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려운 靈的 作業이다.
金允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