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소리엔 슬픔이 있었다. 그는 『우리는 어떤때 바람을 잡고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순례자들은 그가 신앙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두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즉 『성신과 은총의 注入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셨고 사도들가 교황과 주교들에게 일임된 교리』이다. 신학적 理論의 洪水를 막을 길 없다. 자신을 예언자로 자처하는 자들은 옛날부터 믿어오던 것을 버리고 허위를 지혜처럼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나 진실히 너희게 이르노니 너희들이 회개하여 아이와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나니라 그러므로 자신을 아이처럼 여기는 자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느니라』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무엇보다 먼저 마음이 설레인다. 교황이 신앙의 해를 선포했다. 만일 우리가 그의 말씀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아이와같이 되어야 할 신앙의 순수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그가 말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신앙의 순수성을 되찾을 수 있는가?우리는 가장 빛나는 世代에 있지 아니하는가! 우리는 原子를 개발하지 아니했는가! 우주비행을 하지 아니했는가! 모든 物件의 가장 작은 비밀까지 식별하지 아니했는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을 정복하지 아니했는가~ 그런데 아이와같이 되라고 하다니! 「넌센스」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거듭 말씀하신다.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그는 바람을 잡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사라은 當代를 제일 현명하다고 본다. 우리는 비록 다음 世代로부터 조소를 받겠지만 과거에 인간 지혜의 頂上에서 자신을 본 자들의 自負心을 지금 비웃고 있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하는 지혜가 있다. 그것은 『나는 믿나이다.』하는 純眞의 지혜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린이처럼 철없고 유치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순진무구하고 정직하고 신뢰심 따위 어린이다운 바람직한 성질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전자는 신앙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성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중심잉 어떤 때 세상사에 아주 현명한 자가 어린아이처럼 유치할 수 있다. 후자는 진실과 믿음의 성품을 가진 자이다. 어린이는 단순하게 하느님을 믿는 그 성품을 소유한다. 어린아이처럼 되기 위해 와야할 어린이 시절을 지낸다는 것은 그리스도敎的으로 成熟의 과정을 밟는 것이다. 은총 · 지혜 그리고 특히 겸손 등은 어린이처럼 되는 신앙의 이 탁월한 행동을 앞세워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자존심과 어린이처럼 유치한 것을 정복하고 어린이다운 성질에 도달하기 위해 어렵지 아니했던 시대가 없었다. 이 순간에 그것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믿어야 한다는 것을 단순히 뜻한다. 가장 현실적인 뜻으로 우리의 신앙은 인식되기보다 체험되어야 한다.
사람은 천주께 대하여 배운 책을 읽을 수는 있어도 참으로 그를 만날 수 없다. 신의 지식인 신학용어를 모두 알 수는 있어도 신알 조금도 모를 수 있다. 형식신학을 조금도 몰라도 신자의 생활한 관례에 살 수 있다.
신앙은 믿음과 함께 끝이 없다. 『나는 믿나이다』라고 말해야 할 자가 신앙없이 믿으면 생활하는자가 아니라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다. 누구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자기 생활에 형제들을 들여보내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나 하느님도 들여보내지 않는 자이다. 신앙은 靜的이 아니요 動的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모든 행동을 둘러싸고 지도한다. 그러나 신앙은 긍정적으로 시작한다. 말로써 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과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과 또 당신이 세우신 교회에 가르쳤고 명하신 모든 참된 요소로써 인간은 시간을 통해 순례도중에서 그 신앙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신앙을 가진 자는 하느님이 자기 창조주임을 알고 신앙을 계명으로써 알지 않고 動的으로 안다. 자신을 하느님게 맡기면서 자기생활에 하느님의 행동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린이 같은 순진성은 하느님을 그대로 안다. 하느님이 자기 생활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천주시요 참 사람임을 믿는다. 그는 성서를 믿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 또 성경에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예수가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안다. 그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우셨음과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그것을 다만 성경을 통해서 알 뿐만 아니라 자기 생활 속에 그리스도를 또 그리스도 안에 자기생활을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생활한 부분으로 그가 체험하기 때문에 안다.
그는 사람은 하느님의 道具가 되기 위해 불렸음을 의심치 않고 또 인간으로서 그들은 자기처럼 약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다고 우리의 약점이 우리가 주님을 신뢰할 때 우리의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믿으면서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요 스승임을 안다. 우리는 신학자들의 업적을 과소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진리를 위한 탐구는 진리이신 천주로부터 언제나 축복받은 탐구이다. 우리는 성신이 인간에게 특별한 은례를 주시기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겸손되이 이 은혜를 구하는 모든 이에게 그것을 주신다. 우리는 인간이 옛 진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탐구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리의 가장 오랜 公式化만이 진리라고 말하지 아니한다.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洞祭에 達할 수 있다. 그러나 신에 대한 지식은 신학용어의 복잡성을 아는 자에게만 制限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말하고저 한다.
하느님은 그와 생활한 관계를 체험하는 자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를 더 잘 아는 자들은 그 안에 가장 완전히 일치해서 사는자들이요 그들 안에 가장 완전히 살도록 그를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결국 이 모든 복잡한 요구는 『나는 믿나이다』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신앙의 해에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하자. 또한 가톨릭신자라 불리는 우리 모든 이의 역할은 베드루를 대리해서 있는 종인 그가 우리에게 말할 때 바람을 잡고 말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믿음의 순진성에 이르는 길이 많이 있다. 그것은 연구를 통해서 신학의 비사를 통해서 될 수 있고 혹 그것은 전에 책을 읽음으로써 절대로 배우지 못했던 인간의 신께 개심한 생활을 통해서 될 수 있다. 그것은 신앙이나 투쟁을 거친 괴롭던 길을 통해, 죄의 광야를 통해 될 수 있다. 그것은 百萬의 길이 있으나 하나의 다른 길을 통해서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것은 어린이와 같이 됨으로써 그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