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네번째로 열린 바 있는 「꾸르실로 드 크리스챤다드」(크리스챤 단기 수련과정) 운동은 1949년 「말로르카」의 헤르바스 주교가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발족시켰는데, 지금은 아메리카 대륙 거의 전역에서 이 운동이 번져가고 있다.
3년동안 이 운동을 벌여온 중앙 아메리카의 혼두라스 공화국에서는 이 운동이 단순히 「가톨리시즘」을 복구시키는 그 이상의 어떤 개혁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3일동안 주야로 실시되는 「꾸르실로」는 혼두라스인이 보다 훌륭한 도덕율과 생활수준 향상에 진력하도록 자극함으로써 이 「꾸르실로」를 받은 많은 사업가들은 고용자의 월급인상은 물론, 고용자의 주택마련에도 재정적 뒷받침을 해주는 실례가 속출하고 있으며 대기업가들은 혼두라스의 매괴성모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매달 2천 「달라」를 기부하고 있다.
「꾸르실로」를 받은 한 「알콜」 중독자를 모아 「클럽」을 조직 선도에 앞장섰고, 한 기사(技士)는 혼두라스의 크리스챤 가정운동 회장직을 선듯 맡은 후 부부 세쌍뿐이던 회원수를 50명으로 증가시켰다. 혼두라스에는 현재 2천4백명의 「꾸르실리스따스」(「꾸르실로」를 받은 자)가 있는데 그중 60명은 정치인들이고 40명은 전(前) 공산주의자 및 그 동조자들이며 국립대학교 교수의 30%가 이 교육을 수료했다.
특히 화제가 된 것은 ①정치적 청부암살단의 강자가 부하 39명과 더불어 호기심에 「꾸르실로」에 참여, 3일 낮 3일 밤 동안 신부들과 가톨릭 평신도로부터 가톨릭교리 강연을 들었는데 얼마 안있어 그는 그의 직업(?)과 많은 소실들을 버리고 농장으로 되돌아간 사실과 ②지금은 권좌(權座)에서 물러났으나 한때는 혼두라스 자유당의 지도자로 신부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갖은 흉계를 꾸밀만큼 반(反) 성직자적 인물이었던 사람이 작년에 「꾸르실로」 훈련을 받고는 그의 새로운 종교적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 정치적 자멸(自滅)을 기꺼이 감수하고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을 반대하는 그의 정당을 탈당, 당수직도 내던진 사실 ③몇년전 큐바에서 폭탄전문 교육을 받고 과테말라에서 「게릴라」전투를 벌여오던 한 젊은 공산주의자가 혼두라스에 와서 청년공산당을 조직하려 노력하던 중 「꾸르실로」를 알고 공산당을 탈당, 지금은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사실들이다.
혼두라스의 「꾸르실로」운동 창립자는 1963년 3월 「뉴욕」대교구가 이 나라에 파견한 당년 46세의 프레스테라 신부이다. 그는 얼마동안 이나라를 둘러본 후 『50년이나 100년이 지나야 학교라도 하나 설립하겠다. 국민 대부분이 굶주리고 있어 전례적 종교교육을 시킬 수가 없다』는 보고를 보냈다.
그래서 그는 우선 협동조합을 조지갛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코스타리카의 대통령이 이나라의 수도 「테구치갈파」를 발문하게 되자 정부는 강가에 즐비한 판자집 철거를 단행하여 67가구가 집을 잃게 되었다. 프레스테라 신부는 기금 3만6천 「달라」를 마련코 「테구치갈파」에서는 처음으로 저리채(低利債) 주택자금을 방출하여 철거민의 주택을 지어주는 한편 사회정의를 고취시키는데 성공했다.
이같은 업적이 「테구치갈파」의 일간신문에 널리 보도됨으로써 프레스테라 신부는 하루 밤 사이에 유명해졌는데 그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즉시 시내의 사업가들과 관리들을 설득하여 「꾸르실로」에 참석시켰다.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돼버린 이 「꾸르실로」에 지하 공산당에서까지 당원들을 보냈으나 전향하는 자가 많아져 요즘은 한사람도 보내지 않고 있다.
「꾸르실로」운동이 날로 번창하자 1963년 「쿠데타」로 수립된 정부는 크리스찬 민주당을 후원하는 정치적 운동이라고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프레스테라 신부는 대통령을 「꾸르실로」에 초대하였더니 「테구치갈파」시의 일간신문에 「톱」기사로 대서특빌되고 정부의 「꾸르실로」에 대한 감시도 즉시 가시었다. 【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