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蟋蟀(실솔) (8) 보이지 않는 실낱 ①
발행일1967-11-26 [제595호, 4면]
H건축사무실에서 나온 정식은 담배가게 앞에서 머물었다.
『차 잡기 힘들겠군 웬 사람이 이리 많을까? 신탄진 하나』
백원짜리 한장을 내밀고 분비는 거리를 바라본다.
『토요일이니까 그럴밖에요 게다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니 결혼식도 많아지고』
낯이 익은 담배가게 여주인이 신탄진을 내밀며 말했다.
담배갑을 찢어 담배 하나를 붙여문 정식은 예식장 쪽에서 방금도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사람들이 무리를 헤치고 걸어간다. 야릇한 흥분이 그의 마음을 다소 산란하게 했다.
화려하고 엄숙한 결혼식 오색무지개 같은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출발하는 신비스러운 의식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바닥 같이 소란스런 것이 아닌 정식의 꿈이었다.
동화속에 나오는 공주같이 꾸민 윤이의 신부모습을 공상하는 것은 정식에게 있어 정말 거창한 꿈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식은 요즘 그것에 대하여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만났으며 윤식이 점점 이상해지기는 해도 그것은 윤이와의 결혼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으면서 정식은 뭔지 알 수 없는 내부의 것이 무너지고 있다는 착각을 이따금 느끼곤 한다.
종로까지 걸아나온 정식은 겨우 택시 하나를 잡아 탈 수 있었다.
S호텔까지 간 그는 프론트에 앉은 사나이에게
『이영근 사장 오셨읍니까?』
하고 물었다.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깍듯이 대답을 하며 그는 경의를 표했다.
정식은 아담하게 꾸며놓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보이가 도어를 밀었을 때 구석자리에 놓인 쏘파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던 이영근씨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늦어 죄송합니다』
정식이 고개를 숙이자 이영근씨는 피든 담배를 눌러끄고 천천히 일어서며 정식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쁠텐데 미안합니다』
찬찬한 목소리로 말한 그는
『앉으시죠』
하며 준비된 식탁을 가리켰다.
『네』
그들은 마주 앉았다.
희끗희끗하게 은빛으로 변해가는 머리를 곱게 빗어넘긴 이영근 사장은 퍽 쓸쓸하게 보였다.
처음 H건축의 소장으로부터 이영근씨를 소개 받았을 때 정식은 깨끗하게 늙은 신사라 생각했다. 오늘 두번째 만나는데 역시 정식은 깨끗하게 늙은 신사라고 생각했다. 그의 눈 앞에는 비대한 그이 부친의 모습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소장 말씀이 자기보다 감각이 신선하고 창의력이 풍부한 젊으니라고, 그래 모든 것을 일임해야겠지만…』
이영근씨는 다시 담배를 붙여물여 이야기를 끄내었다.
『소장님께선 너무 저를 과대평가 하신 겁니다』
정식은 적당히 겸손을 표시한다.
『하지만 소장하고 나하곤 오랜 친구니까 허튼 소리 할리가 있겠소? 사실은 내 집을 짓는게 아니고 내 딸 녀석 집을 짓는거요』
『네?』
『지금 미국에 가 있는데 돌아오기 전에 집을 마련해 놓아야겠단 말이다. 식구래야 두 내외에다 어린 것 하나… 그애만 여기있음 알아서 할 일이겠는데 본인이 없고 약간 성미가 까다로운 편이어서, 그애 습관이라든가 취미같은 것 참고 삼아 얘기할려고 오늘 만나자고 한거요.』
『네』
『땅은 장만해 두었으니까 한번 가보시고 설계가 끙나면 내년 봄부터 일을 시작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죠』
『조그마한 주택이니 보람 있는 일도 아니겠지만 』
『건평은 얼마쯤이나?』
『오십평쯤 뭐 건평에 너무 구애될 건 없구 대지는 사 · 오백평 되나분데 그애는 좁은 것을 싫어하니까 방의 수보다 방의 공간을 써야할게요. 비용은 제한하지 않을테니 작품하나 하는 기분으로 해주었음 좋겠소』
이영근씨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햬끼하면서 정식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힘껏 해보겠읍니다. 하지만 견문이 좁아서 만족하실만 하게 할는지 염려되는군요.』
『조금도 염려할 건 없구 소장 말이 미국에 간다고 그러든가?』
『네. 신변사정으로 늦어지는군요』
『음…』
웨이터가 음식을 날라왔다.
정식은 음식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이 정도의 대화를 위해 바쁜 이영근시가 햇병아리 같은 자기를 점심초대까지 한 일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김일우씨라구?』
정식의 눈이 순간 자랑스럽게 빛났다.
『존함은 일찍부터 들었지만 한번도 만나뵌 일이 없군』
하는데 이영근씨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솟았다가 갈아앉았다.
『박력이 있고 담이 세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 아마 내 연배쯤 됐을거요』
『그럴겁니다』
『형제는 많은가?』
어느새 이영근씨의 말투는 아래사람을 대하는 것으로 변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