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필자는 한 젊은 학생에게 가끔 영화구경을 가느냐고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좀 당황하는 기색이더니 결국 『한 주에 두번 정도 간다』고 실토했다. 그에게 성당에는 한 주에 몇번이나 나오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가 평일에는 좀처럼 성당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필자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 학생은 한주에 성당에 나오기보다 영화관에 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그 학생 한 사람에게 한(限)한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성당보다 영화관에 저 자주 가는 젊은이들은 얼마나 될까? 첫째로 알아보아야 할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또한 이것이 사목활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간단한 대화가 필자로 하여금 한 가지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였다. 현재 필자는 많은 학생들이 성당의 전례 의식에 참여하여 보내는 시간보다 영화를 구경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더 나은지 어떤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 본당의 신자 학생들에게 「앙께뜨」를 받아보면 쉽게 실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앙께뜨」에 의해, 필자가 한 특정의 학생과 주고 받은 대화의 내용이 일반적 현상으로 확인된다면 다른 본당에서도 같은 조사를 해 보아야 한다고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상당한 수의 학생들이 영화관람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어떤 사목적 대책이 세워져야 한다. 예컨대, 어떤 특정의 영화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토론 「그룹」 같은 것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빌어 조직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중요한 사회적 도덕적 문제들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르며, 동시에 그리스도 신자에게 자기 주변의 현실을 관찰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과 영화 이야기를 한 같은 날, 얼마 뒤에 한 청년이 필자의 방으로 찾아들어 왔다. 작은 「빽」을 손에 든 그 청년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는 새로운 공장들이 많이 세워지고 있는 이 지방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고향마을을 떠나 왓다고 사정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청년이 물러간 뒤, 필자는 다음과 같이 자문자답(自問自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현재 한국 전역에 걸쳐 새로운 공업지대에는 이 청년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
이 지방에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만약 우리가 그 실정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사회 「센타」 비슷한 사업을 시작해 볼만도 하다. 연후에 우리는 외딴 벽촌에 성당을 하나 더 짓느니 보다 오히려 공업 지대에 사회 「센타」를 하나 세우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주교님에게 진언(進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조사해야 한다.
매년 해당 공업도시로 모여드는 노동자의 수는 얼마나 될까? 그들 가운데 가톨릭신자의 수는? 그리고 이 신자들은 어떤 영적(靈的) 도움을 받고 있는가? 특히 주일에도 미사에 참여할 시간을 얻지 못하고 일을 해야하는 사람들의 영적 생활은 어떠한가? 등등을 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상 두 가지 예화(例話)를 통해 필자가 말하고자 한 바는 사목활동은 먼저 추상적인 용어로 정의(定義)되고 그 뒤에 현실에 적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한다. 부단히 변천하는 세계에서 가톨릭은 항상 새로운 사태에 대처하도록 소명(召命)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정신을 차리고 우리 주변의 여론에 주의깊이 귀를 기울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계에 관해 가능한한(限)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물론 이 제일단계의사업이 한 사람의 힘으로는 실효(實效)를 거둘 수 없다. 여기에는 어떤 형태로든 「팀웍」이 필요하고(네 사람이 따로따로 일하는 것보다 네 사람이 협력하여 함께 일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또 기본적인 사회학적 방법(앙께뜨, 질문 등)을 이용할 필요도 있다. 제2단계로는 실천가능한 일을 결정하기 위해 이 방면에 관심을 가진 인사(人士)(들을 규합(糾合)하는 일이다. 여기서는 현안(懸案)의 문제에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모으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이것은 또한 「작은 편실화 작업」을 시작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요건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한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많은 학생들이 예컨대 한 주에 한번 이상 영화를 보러간다는 사실을 몇몇학생의 도움으로 조사확인했다면 목자는 그 학생들을 인솔하여 어떤 영화를 관람한 뒤 한 자리에 모여 그 내용에 대해 토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두 세번 해본 뒤에는 학생들에게 자기 친구들을 신자이건 미신자이건 한두 사람씩 데려오라고 권하면 좋겠다.
목자 자신은 몇몇 교사들에 관심을 가지고 접촉해 볼 만하다.
둘째 예에 있어서는 우선 몇몇 신자노동자와 접촉하여 여러가지 물어 보고 실정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일을 끝낸 뒤 정기적인 회합을 갖기 위해서는 방을 하나 얻는 것이 좋겠다. 신부는 사람들에게 사제관에 모이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특히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해야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렇다. 이와같은 작은 모임이 점차 발전하여 큰 모임으로 불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사제는 노동자들의 생활에 관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또한 그들을 여러모로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어떤 종류의 사목활동에 있어서나 필요하고 또 매우 유익한 품성(品性) 세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풍부한 구상력(構想力)과 폭넓은 겸덕(謙德)과, 동포들의 생활과 문제점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우리 사제들은 만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예외없이 배울 용의가 있음을 겸솜되이 밝혀둔다.
韓 벨라도(神博, 司牧專功, 馬山市 완月동본당 主任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