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끌리는 교회냐? 이 끄는 敎會(교회)냐?] 소위 現代化(현대화)·刷新(쇄신)에 붙여 ㊤
流行歌(유행가) 바레로 宗敎的(종교적) 觀照(관조)이룰까…
敎會(교회) 不調理(부조리)한 現實(현실) 直面(직면)
現代化(현대화)는 現實(현실) 妥協(타협) 아닌 더 긴밀한 대결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는 다른 어느 시대보다 복잡하고 不條理한 시대라고들 한다. 思想면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어떤 槪念에서 만족하지 않고 모든 것을 숫자로써 측정하려 든다. 사도 토마스는 부활한 예수의 손바닥에 뚫린 못박혔던 구멍에 자기 손가락을 집어넣어 확인함으로써 부활한 사실을 인정했다.
現代人은 그 이상의 것을 원한다. 그래서인지 無神論者들 처럼 經驗밖의 것은 믿지 않든지 아니면 통계수자로써 表現하려 든다. 신에 대한 개념마저 經驗論的입장에서 판단 하려든다. 이것이 바로 現代의 不條理한 사상을 뒷받침 하고 있는 커다란 모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공을 벽면에 힘껏 던졌을 경우에 그 던져지는 힘 또는 속도에 비례해서 일정한 物理的 反應이 나타남은 뉴톤운동의 법칙 그대로다. 그러나 내가 어떤 누구를 사랑했을 경우에 그쪽으로 쏟아지는 사랑에 비례해서 어떤 일정한 반응이 조건반사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는 물질이요. 하나는 정신이기 때문에 하나의 공식이 양쪽에 적용될 수없는 것이다. 지금 교회는 이와 같은 不條理하고 복잡한 현실 앞에 맞서 있는 것이다. 敎會가 現代속에 뛰어드는 것은 그 본질상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대상이 없을 경우 교회는 필요없는 것이 된다.
그로서 대상이 필요하지마는 그 대상에 同和되어서는 그 자체의 生命을 상실하게 되고 만다. 왜냐 하면 교회는 어디까지나 교회다워야 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神을 잃었기 때문에 虛無하다고 했다. 아마 지금은 과학이나 金力이 신처럼 神秘롭고 커다란 위력을 갖고 있기에 구태여 神이 필요치 않다고 보는지도 모르겠다. 니체처럼 神은 죽은 것도 아니고 잃은 것도 아니다. 다만 거센 대중속에 빼앗긴 것이리라.
흔히들 대중은 虛偽라고 말한다. 분명 대중은 우쭐거리는 집단으로서의 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정도 되지 않고 흥분 산만해 있는 파도속에 神을 빼앗긴 것이다. 神의 얼굴에 돈이나 과학이라는 기술을 씌워 보기도 하고 인간얼굴의 탈을 쓰워 보기도 하여 神이 희롱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眞理가 多數決에 의해서 결정 지워질 성질이 아닐진대 지나치게 대중의 思考를 절대시할 이유도 없다. 적어도 교회에 있어서의 現代化라는 것은 現實과의 妥協이 아니고 現實속에 더 깊숙히 파고 들어가서 가깝게 마주 앉아 이끈다는 것이지 결코 同和된다는 意味는 아닐 것이다.
現代가 神을 外面하고 感覺的快感과 肉體的享樂에서 모든 生의 가치를 求하려 한다고 해서 至嚴하고 至高한 者의 제사에 感傷的이요. 類廢한 流行가의 曲調를 이용하여 神을 찬양하고 바레로써 視線을 集中시키고 북소리로써 주위의 분심을 일으키게 하여!
그리하여 째즈와 춤과 북과 또 祈禱의 不協和音으로써 이루어질 때 그 속의 개인들이 째즈와 춤과 북소리가 주는 固有한 觀照의 세계에 서있겠는가? 아니면 그래도 神과 한 인간이 마주치는 일대일의 純粹祈禱속에서 있겠는가?
한번 생각해 볼 問題다. 기어코 그런 것이 合理的이고 새로운 방법이라면 그리스도교의 어느 분파처럼 기압술을 이용해가면서 또는 발로 굴리고 손벽을 쳐가면서 怪聲을 내 지르는 狂的분위기로 진행되는 禮式이 얼마나 발전된 것이냐?
프랑스의 단편에 나오는 한 광대처럼 神을 찬양할 수 있는 자기의 기능이 오직 한가지 밖에 없을 경우 그 한가지 방법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뿐만 아니고 객관적면에서도 普通 妥當性을 지닌 가장 크고 귀한 唯一의 기도일수 밖에 없다.
빠나 땐스홀에서 찾아야 할 것이 따로 있고 다방에서 찾아야할 것이 따로 있고 市場에서 얻을 것이 따로 있고 敎會에서 아니면 찾을 수없는 오직 교회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을진대 대중속에 젊은 세대속에 찾아 들어감은 현명한 일이나 거기에 조금이라도 同和되어버리는 교회라면 이것은 이끄는 敎會가 아니고 이끌리는 敎會일 것이다.
罪아닌 방법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더 次元높은 방법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10~20년전에 구미에 불교사원이 있는 둥 없는 둥 하던 것이 지금 와서 구미각처에 불교 붐이 일어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가? 미국속의 불교가 대중속에 뛰어들어 佛經曲調를 유행가곡조로 대치했던가? 固有한 佛敎의 승무대신림 보나 트위스트를 이용했던가? 역시 고려해 볼 문제다. (계속)
尹炳錫(美術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