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27) <第二話(제2화)> 榮光(영광)의 敗北(패북) ⑬
발행일1968-09-08 [제634호, 4면]
『어쩌면…』
은설은 이야기를 반도체 못들었을 때부터 그 이야기가 윤 사장 자신에 대한 이야기인줄을 알았다. 그는 정아에게 들어서 이미 사실의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매정한 아버지를 정아와 함께 원망한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뜻밖에도 바로 그 장본인에게서 사건의 자세한 경위와 심경의 솔직한 고백까지를 듣고 나니 은실은 실로 얼떨떨하였다.
먼저 그는 윤 사장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인면수심의 추악한 배신행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장본인이 늙고 병들어 모든 과거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할 수가 있겠는가. 은실은 눈앞에 죄인이 아니고 한 가엾은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늙고 야윈데다가 극도의 피로가 곁들어서 얼굴전체에 검은 그림자가 덮여 있었다. 이미 그에게서 패기와 야망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윤 사장을 차근차근히 바라보던 은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리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미스·양?』
윤 사장은 또 수건을 끄내어 이마와 뺨의 땀을 닦으며 어색하게 은실을 불렀다.
『네?』
『똑바로 말해주어. 미스·양이 어떤 말을 해도 나는 결코 화를 내지 않을 테니까 마음먹은 대로 솔직하게 말해주어.』
『무엇을요?』
『미스·양은 나를 속으로 경멸할테지? 나를 나를 나쁜놈이라고 욕할테지?』
『사장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은실은 딱한 듯이 윤 사장을 바라보았다.
『아냐 그건 공연히 인사치레로 말하는 거고 사실은 나를 속으로 몹시 미워하고 경멸하고 있을 거야.』
윤 사장의 얼굴은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대단히 절박하고 긴장하였다.
『물론 옛날 해외로 가실 당시에 제가 가까이서 그 사건을 보았다면 미워하고 경멸했을지도 모르지오. 그렇지만…』
『그렇지만?』
윤 사장은 눈을 크게 뜨고 은실을 바라보았다. 윤 사장의 눈은 마치 은실의 입언저리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지나간 옛날일이 아닌가요. 그리고 사장님은 모든 과거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계신걸요.』
『그렇다면 한마디만 더 묻겠는데…』
『무언데요?』
『이것은 지금 나한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니까 조금도 인사치레 같은 것은 빼어놓고 솔직히 있는 그대로 대답해주어』
『그러지요』
『그렇다면 묻겠는데 만일 미스·양이 그 여자 가정교사나 그의 딸이라면 지금의 나를 용서해줄 수 있을까? 이렇게 뒤늦게 돌아와서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하면 이 뻔뻔스러운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을까』
윤 사장은 은실이가 아니고 거기 앉아있는 것이 정아모녀나 되는 것처럼 얼굴에 애원하는 빛을 띄고 목소리까지 가볍게 떨리었다.
『글쎄요』
『글쎄라니? 그럼 나를 용서할 수 없단 말인가? 미스·양 나는 만일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죽어도 눈을 감지못할 거야. 지금의 내 이 절박한심정은 아무도 알지 못해. 나는 재깍재짝시계의 초침가는 소리마저 안타까울 지경이야.
나는 어떤 일이 있든지 용서를 빌고 지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지은 죄의 몇만분의 일이라도 보속을 해야 하겠어. 생각하면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인생을 빈껍데기를 부동켜 안고 살아온 거야. 그러다가 내 정신으로 돌아왔을때 나는 이미 시간이 없어졌어. 나에게는 재깍재깍 움직이는 초침이 금조각 처럼 귀중한 시간이야. 내 목숨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어. 어쩌면 이 이야기만 하고나서 오늘밤으로 나의 목숨은 끝이 날는지도 몰라.』
『사장님은 왜 자꾸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냐. 미스·양의 호의는 고맙지만 내 말은 모두가 어길 수 없는 진실이야. 그래서 나는 급히 서울로 돌아와서 그동안 거죽으로는 회사 일을 보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 모녀를 찾기에 온갖 애를 다 쓴거야. 내가 떳떳치 못하니까 내어놓고 찾을 수도 없었어. 그저 남몰래 찾은 거야. 그러다가 우연히 미스·양의 친구인 그 처녀를 만났지. 나는 그 처녀를 처음 만났을때 하마터면 소리를 칠뻔했어.
그 처녀는 바로 이십여년 전에 그 여자가정교사를 그대로 옷만 바꾸어 입혀서 데려다 놓은 것이었어. 오죽하면 이렇게 늙고 병든 몸이 체면도 불구하고 주책없이 그 처녀의 뒤를 따라갔을까』
이 이야기를 듣자 은실은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내가 하는 행동이 주책없는 짓인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지. 그렇지만 그런 기적과 같은 우연을 당하여 그 귀중한 기회를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어.
그러구 그런 기회를 포기하기에는 나에게는 너무도 시간이 없었어. 그래서 나는 죽을힘을 다해서 그 처녀를 따라 갔던거야. 그리고 그 처녀는 아니라고 잡아떼지만 나는 굳게 믿고 있어. 그 처녀는 분명히 정아일 거야. 내가 그에게 그의 어머니 이름을 댔을때 그는 확실히 깜짝 놀랐거든. 그리고 내 직감이 이건 바로 마다하는 굳은 신념을 만들어 주었어. 물론 그 애가 아니라고 잡아떼어도 나는 할 말이 없지.
지금 와서 나는 너의 아버지다 너는 내 딸이다 하고 말할 자격이 나한테 없으니까 말이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정아를 사랑해. 지금 그 애를 위해서라면 내 팔이나 다리라도 선듯 떼어줄 마음이야…』
이야기를 하다가 윤 사장은 말문이 막히며 손수건을 끄내어 눈을 가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