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蟋蟀(실솔) (9) 보이지 않는 실낱 ②
발행일1967-12-03 [제596호, 4면]
『동생이 하나 있읍니다』
정식은 미간을 좀 찌프리며 대꾸했다.
『음 어머님도 계시고…』
이영근씨는 우물우물 음식을 씹는듯 묘한 투로 다시 물었다.
『네』
그리고는 더이상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미국에 있는 딸을 위해 지을 집에 대해서도 말이 없었다. 다만 이따금 정식을 찬찬히 살펴보곤 할 뿐이었다.
정식은 다소 이상한 감이 들었다.
(이 노신사는 이제 할 일이 없어졌단 말인가. 아무리 귀여운 딸의 집을 짓기로서니 풋내기 나를 데려다 놓고 식사대접까지 하며 별 신통한 말도 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으니 말이야. 아버지 같음 어림이나 있는 일인가? 항상 시간이 모자라고 정력이 넘쳐 주체를 못하는데 이 노 신사는 어딘지 고독해 보인다.)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신 뒤 정식은 일어섰다.
『아 갈려고 그러우?』
이영근씨는 생각에서 깨어난듯 담배를 눌러끄고 일어섰다.
『네. 우선 윤곽이 잡히면 소장님하고 의논해서』
『집 설계말인가?』
남의 일처럼 되묻다가 이영근씨는 당황한다.
『알아서 하도록 신경 너무 쓸건 없구』
그들은 호텔 로비로 나왔다. 이때 뚱뚱하게 목이 다붙은 중늙은이가 여자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정식은 꿈틀하며 몸을 흔들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린다. 정식의 부친은 다행히 정식을 보지 못하고 지나갔다.
이영근씨와 헤어진 정식은 허둥지둥 택시를 잡아탔다.
아버지가 더러 바람을 피우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바로 목격한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사실 정식에게는 일종의 결벽증이 있었다. 그가 윤이에게 집념하는 것이나 최근에 와서 윤식을 쓰디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은 예의 그 결벽증이 많이 작용한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힘의 우상처럼 생각하는 그에게 윤식이 사기꾼이라는 말을 농하는데 분노하는 것도 예의 그 결벽증 때문인지 모른다.
정식은 택시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벌써 오니?』
시들기 시작한 잔디밭, 벤취에 앉아있던 옥 여사가 말을 걸었다.
『별 할 일도 없구 해서요』
『음』
『감기 드실려구 밖에 계세요?』
『햇볕이 따스해』
옥 여사는 그림 속의 인물처럼 말을 한뒤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
『음』
옥 여사는 멍한 눈동자를 정식에게 던졌다.
창백한 얼굴 · 물기없이 말라버린 손 · 정식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가슴이 칵 막힌다.
『외롭지 않으세요?』
저도 모르게 뚱단지 같은 말이 나오고 말았다. 호텔 로비에서 젊은 여자하고 함께 온 아버지를 만난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옥 여사는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먹음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식은 잔디밭에 퍽 주저앉아 벤취에 앉은 옥 여사를 올려보듯 하며
『어머니』
『………』
『어머니는 윤이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께…』
정식은 언젠가 꾼 꿈을 생각했다.
『마음에 안드세요?』
『참하드구먼』
『그럼 마음에 드시는군요』
『내 마음에 들어 뭘하니?』
『허지만 어머니 마음에 안드시면 안되죠』
옥 여사는 아무 말하지 않고 정식의 얼굴을 외면하더니
『윤이는 널 좋아하니?』
나직한 목소리였다.
『그럼요』
『그럼 됐다 나 피곤해서 방에 들어가봐야겠어』
옥 여사는 일어섰다. 그리고 느릿한 동작으로 집안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정식은 그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후 방으로 들어온 정식은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하다가 식당으로 내려가 혼자 쓸쓸하게 저녁식사를 끝내었다.
응접실로 들어온 그는 신문을 보고 음악을 듣다가 다시 이층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이 오늘 하루동안 가장 충격적인 일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마음어느구석에 집어넣어 두면 못견딜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의 우상화에 방해가 되는 일이면 번번히 그런식으로 한구석에다 몰아넣어버리고 그것에는 눈을 감아버려 왔으니까.
그러나 지금 정식에게 묘한 분위기로 몰려온 것은 낮에 만난 이영근씨였다. 만나고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자세히 선명하게 이영근씨의 표정을 상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째서 묘한 분위기였는지 정식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하고 퍽 대조적인 인물이어서 그럴까? 그 양반은 왜 내 얼굴을 그렇게 자세히 뚫어봤을까? 자니놓고 보니 뭐 반드시 따님의 집 때문만은 아닌 것 같구… 혹 사업관계때매 아버지한테 다리라도 놓으려고 그랬던걸까?)
이일 저일 생각했으나 그 사상은 모조리 사실과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