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世紀(세기) 作家(작가)들 ③ 프랑소아 모리아끄
人間慾望(인간욕망)과 神(신) 追求(추구)의 葛藤(갈등)
作家自由(작가자유)지키면서 은총없는 세계비판
「데렐이즈데케일루」 地上서 번뇌하는 人間(인간) 무리
“絶望(절망)은 禁止(금지)된 快樂(쾌락)”
모랄리스트로서의 格(격) 높은 엣세이
프랑소아 모리아끄(1885-)는 프랑스의 「보르도」에서 出生하였다.
信心깊은 어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는 청년기에는 지이드, 끌로오델 등의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는 詩를 쓰고, 이어 小說을 쓰면서부터 一貫하여 이른바 「모리아끄的 問題」를 제기해왔다.
즉 혼돈, 罪 및 惡의 深淵, 증오 · 복수 · 물질적 탐욕이 主調가 되어 움직이는 시골의 가정 등을 그리고, 인생을 육체적 욕망과 神追求와의 끊임없는 葛藤으로 묘출하였다.
그 作品의 대부분이 「人間」과 「家庭」에 대하여 가혹하리만큼 비판적이기 때문에, 일부 가톨릭 批評家들의 신랄한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모리아끄는 말한다.
『良心의 시판에 거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세계, 은총이 缺如된 비참한 세계를 作家로서의 내 自由를 포기하지 않고 마음대로 묘사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간접적으로 변호하게 됨을 나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다 - 神聖한 법
의 侵害를 돋보이게 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세계를 현실 그대로 再現, 묘사할 수는 절대로 없다고.
어쨌든 1952年에 노벨文學賞을 받은 모리아끄는 20世紀의 가장 유명한 가톨릭作家의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섬세한 心理 묘사, 세련된 奇巧 誠實과 사랑에 넘친 筆致로 해서 흔히들 쁘루스뜨 以後의 프랑스 第一流作家라 한다.
그의 많은 作品은 대체로 「神 없는」 主人公이 靈肉의 苦鬪끝에 良心의 가책과 自覺을 거쳐 回心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그의 代表作으로 손꼽히는 「테레에즈 데케일루」(1927年作)에서는 主人公인 젊은 夫人 테레에즈에게서 끝까지 아무런 「救援」도 찾아볼 수 없다.
作者 자신이 『진창같은 肉體 속에 묻혀 뒤헝클어져 있는 마음의 이야기』라고 한 이 小說의 題詞로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비오니,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男女의 무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보들레르의 詩句를 빌리고 있다. 「보르도 태생인 作者는 이 作品에서도 그 낯익은 「란드」 地方을 舞臺로 하여, 황량한 모래밭과 松林, 뜨거운 여름과 가울에서 겨울에 걸친 장마를 배경으로 回想的形式에 內觀的 描寫法을 구사하여, 이 地上에서 번뇌하는 人間의 모습을 생생하게 浮彫시켰다.
이 외에 小說로는 「문둥이에의 키쓰」 「사랑의 砂漠」 「살무사의 뒤얽힘」, 劇作으로는 「아스모데」 「사랑받은 惡」, 傳記로는 「라씨이누傳」 「예수傳」 등이 유명하고, 뛰어난 모랄리스트로서의 엣세이도 많다. 다음에 모리아끄가 「이 세상에서의 最後의 希望」이라는 題目으로 現代의 젊은이들에게 준, 뜻깊은 助言의 몇 귀절을 抄譯한다.
『……젊음과 힘을 숭배하라는 니체的 思想이 실은 허위라는 것이 차차 밝혀져 가고 있다.
現代人의 絶望이 치라투스트라의 「神은 죽었다」는 주장에 의해 배양되었다는 사실을 오늘날 누가 否定하겠는가.
만약 神이 存在하지 않고 또 그 때문에 사람이 무엇을 해도 괜찮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허용될 수 있는 것은 아마 「絶望」일 것이다.
우울한 마음은 이 세상은 엉터리다, 따라서 우리도 세상과 같이 엉터리가 되어도 무방하지 않은가 하는 어두운 생각에 즐겨 몰두한다. 信仰과 같이 우리 생활에서의 希望은 神學的 德이다. 그리스도 신자는 貞淑해야 하고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되는 의무와 똑같이 希望을 가져야 하는 의무도 질머지고 있다. 絶望은 禁止된 快樂이요 誘惑이다. 우리는 여기에 굴복하지 말라는 계명을 받고 있다. 그러나 특히 우리의 청년시절에 이 誘惑이 우리를 엄습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가장 심각한 고뇌와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20代이다.
不安을 얻고,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순순히 받아들이고, 베르나노스가 임종의 「시골 司祭」로 하여금 말하게 한 「모든 것은 성총이다」라는 말이 뜻을 깊이 음미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晩年인 경우가 많다. 참으로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성총」에 달려 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고 또 믿고 있다. 혹은 기도할 때 혹은 성체를 영할 때, 혹은 마음과 마음이 야이기를 주고 받을 때 이것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神이 存在하지 않고, 또 이 세상에 지향할 方向이나 궁극적 목적이 없다면, 따라서 이 세상이 無에서 생겨나 無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人間은 상업상의 살풍경한 機構에 속박되고 組織의 단순한 一介要素(그것이 資本主義制度에 있어서의 個人的利益을 위한 것이건, 혹은 黨이나 國家나 集團을 위한 것이건)가 되어버리며, 그 나날의 단조롭고 냉냉한 生活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에 아무런 애착도 가질 수 없게된다. 만일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고 또 우리의 希望도 헛된 것이라면, 모든 사람은 文字 그대로 囚人이 되어버릴 것이다.
生活을 위해 無理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小數의 特權階級들조차 더 나쁜 노예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快樂의 포로가 되고 악덕의 自動人形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영원한 希望의 「豫知」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努力하는 것, 혹 불행히도 그것을 잃었다면 되찾으려고 努力하는 ㄴ것,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 신자의 地上的 希望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계속)
金允柱(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