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誕節(성탄절) 典禮(전례)의 歷史的(역사적) 考察(고찰)
復活節(부활절) · 聖神降臨節(성신강림절) 보다 늦게 發展(발전)
聖書(성서)엔 日字明示(일자명시) 없고 1月(월) 6日(일) 등 5說(설)
미사 세대, 6世紀(세기) 城地(지역)서
처음은 敎皇(교황(만 세대 봉헌
예루살렘서 베틀레헴까지 初世紀(초세기)때는 夜間行列(야간행렬) 祝祭(축제)
성탄의 즐거운 축일은 많은 관점에서 가장 매혹적이요 신비롭다. 무엇보다 먼저 이 축일을 자체를 위한 첫째 이유인 신의 아들의 강생에 큰 신비가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미사 세대를 드리게 되었는지? 또 이 축일의 기원과 날짜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도 있다. 통속 신심에 이렇듯이 훌륭한 위치에 있는 이 축일이 부활이나 성신강림 축일보다 더 늦게 발전했다는 것이 어떤이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성탄이 늦게 발전했다는 이유를 적어도 두가지 들 수 있다.
첫째, 이유는 초대신자들의 신학과 靈性의 方向이다. 초대교회는 잠정적인 時点에서 보다 그리스도의 또 그리스도 안에 그들의 생활의 영원한 終點에 더 관심이 많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비사에 열중하여 世末을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활과 성신강림축일이 먼저 발전됐다. 그들은 강생에 대해서 덜 생각했고 제4세기의 그리스도論的 異端 때문에 성탄은 더 늦게 온 것이다.
둘째로 부활과 성신강림은 새 축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실 구약에서 좋교적으로 이미 실천하던 축일을 단순히 그리스도교적으로 연장한데 지나지 않는데 반하여 성탄은 冬至와 관련있는 外敎人의 축일을 없애기 위해 설치된 새로운 축일이었다.
제4세기 이전의 성탄축일에 대한 명백한 문서에 의한 증거가 없다. 제일 이른 증거는 「필로깔리아 曆」 즉 354년의 年代學者에 의해 편찬된 로마주교들의 「리베리아」 목록에 발견된다. 이 문서는 성탄이(유다 베틀레헴에서의 그리스도의 탄생) 제4세기 중엽에 「로마」에서 12월 25일에 거행되었다고 명백히 말한다. 하나의 매우 중요한 문제는 날짜인 12월 25일에 관한 것인데 그날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탄일로 선정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날짜에 대해서 복음서에 아무말이 없고 또 여기 대한 설명을 돕는 아무런 비 종교적인 근원도 없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이날을 정하는 방법이 없다고 결론지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초대교회의 많은 성직자들이 날짜에 관하여 추측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어떤 이는 1월 6일, 4월 20일, 5월 20일, 11월 17일 또 어떤이는 3월 28일을 잡는데 그것은 태양이 창조된 날이었다는 까닭이라 한다.
그리스도의 탄일을 12월 25일로 택한데 관한 여러 학설이 있다. 어떤 이는 12월 5일과 그리스도의 사망의 추측일인 3월 25일 사이의 연결성을 보고 있다. 다른 이는 「聖母領報」라는 사실에 중요성을 둔다. 그러므로 주님이 잉태대신 날을 3월 25일에 지킨다. 현저한 신빙성을 주는 다른 학설은 12월 25일은 제3세기말에 대단했던 태양神 미트라스의 外敎人祝日의 영향을 없애기 위해 성탄날로 교회에 의해 선택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그럴듯한 해석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이 논리적이요 또 초세기에 어떤 外敎人의 축일을 이름짓는 일을 그리스도교에서 실처한 것과 맞기 때문이다.
성탄 축일의 발전에 있어 일년중 가장 중요한 축일인 부활과 비슷한 점을 적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성탄절에 부활절과 같은 숫자를 발견한다. 준비하는 기간인 대림절은 한때 현재 4주일 대신 6주일이었다. 主日 고유 성무일과와 미사가 있고 저녁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래서 「거룩한 밤」이란 이름을 사용했고 八部가 있고 또 光明의 「심볼」이 특히 주어졌다.
이 축일을 거행하기 위해 개개의 분리된 고유미사 세대를 올리는 것이 의심 없이 성탄축일의 가장 異例的인 점이다. 이런 방법으로 지내는 것은 그리스도교 인력의 축일에만 있다. 교회에서 성탄날 미사 세대를 결정적으로 올리게 된 것은 6 · 7세기 그레고리오 1세 교황 때였다. 그리스도의 탄일을 축하하기 위해 미사 여러대를 올리는 기원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신자들은 구세주의 一生의 여러가지 사건을 최초의 사건의 장소와 가까이 또 가능한 限 그 시간에 가깝게 기념하고저 했다. 예수께서 「베틀레헴」에서 나셨고 성서와 성전은 잠중에 이 사건을 두었고 교회는 밤미사를 위해 「예루살렘」에서 「베틀레헴」에 있는 대성당에서 다른 미사를 아침에 드리기 위해 돌아왔다. 차차 「로마」에서 그렇게 했다. 교황은 「예루살렘」에서 하던 것을 본보기 위해 성 마리아 대성전의 구유가 있는 제단에서 밤미사를 올리고 아침미사는 집회소 성당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올렸다. 이것이 성탄 미사 두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셋째미사는 세 미사의 중간이 되는데 역사적을 좀 희미하다. 하나의 해석은 「로마」에 있던 「비잔틴」 식민지 사람들이 12월 5일에 「실미움」의 순교자 성 아나스따시아를 긴며햇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교황께서 성모 대성전에서 밤미사를 올리고,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돌아가는 길에 왕실성당에서 둘째미사를 올린 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셋째 미사를 올렸다. 이 왕실 성당이 성 아나스따시아에게 봉헌된 것인지는 모른다. 12세기에 전에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올렸던 셋째미사를 성모 대성전으로 변경했다. 그것은 성 베드로 대성전까지 가는 길에서 오는 피곤 때문이라 한다. 오늘 미사경본에 보면 제1 · 3 미사의 집회소가 성모 대성전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면 납득이 간다.
처음에는 이 미사 세대를 교황만이 거행했다. 10세기 이후 다른 사제 세 분이 거행했다.
어떤 순교자 축일에 무덤에서 미사 한 대 또 다른 미사는 유명한 성당에서 한 대 혹 두 대 이렇게 두 대 혹 세 대 올린 역사가 있으나 성탄미사 세 대를 일반 성직자들이 드리도록 특권을 확장한 것은 12세기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