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끌리는 교회냐? 이 끄는 敎會(교회)냐?] 소위 現代化(현대화)·刷新(쇄신)에 붙여 ㊦
교회 公議會(공의회) 계기로 歷史(역사)의 渦中(와중)에
不安(불안) 허무한 現代(현대)에 唯一(유일)한 희망
現實(현실) 적용이라고 그리스도교 特性(특성)마저 말살시킬 수 없어
교회가 社會에 참여해야 함은 그리스도교의 本質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광야에서 산위에서 길거리에서 또는 성전에서 무식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천대받는 사람들 속에 뛰어 들었다.
최근에 와서 보더라도 레오 13세 부터 삐오 12세 까지의 교황들의 친서(CHIROGRAPMOM) 회칙(LITTERAE, ENCTCLICAE) 교황청렴(CONSTITUTIO APOSTOLICA) 자발교서(MOTUPROPRIO) 등에
社會問題에 대해서 직접간접으로 관심을 기울인 흔적이 뚜렷하다. 삐오 12세는 가톨릭 악숀 회원에게 『반성과 계획의 시기는 지나가고 지금은 바로 行動의 때다. 제군들의 준비는 다 되어 있는가?』고 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사회공익에 몸바쳐 일해야 한다』고도했고 『옛날의 십자군은 聖地를 탈환하려 했으나 오늘은 시대적 과오의 大海를 넘어서 영적 성지를 구출하는 새로운 십자군이 필요하다』고 했다.
요한 23세 바오로 6세 교황은 제2차 「바티깐」 공의회로서 이 시대적 과오의 大海에 뛰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운명 앞에 항해를 위한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보수 작업을 완료한 것이라 생각된다. 구라파에 노동사제가 부활된 것을 보더라도 교회는 부단히 세속속에 현대의 밑바닥 속에 뛰어 들어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가만이 앉아 있다가 찾아오는 손님에게 福音을 전하라 하시지 않았고 너희는 가서 만민을 가르치라고 하셨다. 직접대 상을 찾아가서 마주앉아 가르치라는 분부였다.
中世는 그나마 교회는 지역사회에 있어서 集會所요 오락과 禮式과 휴식과 思想과 기도의 장소로서 대중과 생활면에 있어서 하모니를 이뤄가면서 영적 지도를 했다. 그리스도교가 超민족적이요 超국가적이요 모든 시대를 초월하는 교회라고 볼 때 그리스도교다운 특성을 지녀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라 해서 한국의 풍속에 최대한 접근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만약 최대한 접근한다면 「샤마니즘」과 유사하게 보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聖堂안은 마치 祠堂처럼 사제나 수녀는 巫堂처럼 그 복장이나 장식이나 색채처리가 비슷해지고 말 것이니 그러고도 超민족 超國家 超時代的인 교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풍속에 접근한다 함은 결국 남의 종교가 아니고 土着性을 띈 바로 개개인 모두의 종교로서 지역민에게 더 친근한 인상을 준다는데 이유가 있고 또 그런 이유라면 풍속에 따라 전례의 내용과 형식을 수정하지 않고도 더욱 친숙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이기에 어디까지나 가장 거룩하고도 공번된 교회로서의 독특한 敎會體臭를 풍겨야 한다. 지나친 형식은허식이지만은 최소한 순서와 내용의 강조를 위한 형식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쉽게 보아 복장이 단정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남이 보는 인상이 같을 수없는 거와 같다.
20세기는 이른 새벽부터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비참한 전쟁을 두차례나 겪었는데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옛날과는 달리 기계의 힘으로 별로 큰마음의 동요도 없이 수백수천만의 인간생명을 순식간에 보지도 않고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현대문명의 기술 앞에 현대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불안이 있고 허무가 있다. 이 위험 앞에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허둥지둥 무슨 큰이유도 없이 몸을 전후좌우로 흔들어보는 내용없는 약동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영국의 시인 월리암 브렉크는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슬픔의 그림자와 피곤의 빛…』이라 읊은 적이 있다. 현대에 사는 모든 이들의 生에 대한 표정을 한마디로 표현한말 같다.
왜? 현대인은 피로하고 슬플까?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슬픔과 피곤의 빛대신 희망과 환희의 강한 빛줄기를 안겨줄 자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러나 方法을 위해 方法에 陷沒될 수 있겠는가? (끝)
尹炳錫(美術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