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28) <第二話(제2화)> 榮光(영광)의 敗北(패북) ⑭
발행일1968-09-15 [제635호, 4면]
『사장님 고정하세요. 그렇게 마음을 약하게 잡수시면 안돼요.』
은실은 딱한 듯이 함께 울먹울먹한 눈으로 윤 사장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미스·양. 내가 건강을 잃은 후부터는 그만 마음이 약해져서…』
윤 사장은 추태를 보인 것이 창피하다는 듯이 눈물을 닦고 코를 풀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홍차를 한잔 더 드릴가요?』
『글쎄. 뜨거운 것을 한잔 더 마셔볼가?』
은실은 나가서 홍차를 새로 한잔 더 가져왔다. 윤 사장은 차를 마시며 자꾸만 흥분하는 마음을 달래는 것 같았다.
『미스·양?』
『네?』
『내가 이렇게 속을 털어 놓은 것은 해외에서나 귀국해서나 오늘이 처음이야. 사실은 서무과장도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거든.』
『서무과장님도요?』
은실은 조금 놀라는 빛을 보였다.
『그렇지. 서무과장 한테도 이런 말을 한 일은 없어. 무엇이 자랑스럽다고 이런 말을 하겠어. 그러니까 내 속마음을 아는 것은 지금 오직 미스·양 뿐이야. 그것도 미스·양이 조금이라도 경솔하고 부족해 보이면 오늘 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거야. 원체 침착하고 정숙해 보이니까 말을 한거야.』
『사장님 너무 말씀이 지나치세요.』
은실은 미소를 지으며 두 뺨이 볼그레하게 물들었다.
『아냐. 내가 사람보는 눈에는 틀림이 없어. 그러구 내가 이렇게 오늘 미스·양에게 속을 털어놓는 것은 부탁이 있기 때문야.』
은실은 고개를 반짝 들어 윤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었다. 그는 윤 사장의 이런 말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스·양?』
『네?』
『내 부탁을 들어 주겠어?』
『무슨 부탁인데요?』
은실의 되묻는 말에는 힘이 없었다.
『정아를 좀 만나게 해주어. 아까도 말했지마는 나는 시간이 없어. 이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냐. 내 건강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 나는 지금 조금도 욕심이라는게 없어. 그러니까 정아 모녀를 만나서 가족애를 맛보고 싶다든지 그런건 생각도 해본 일이 없고 또 감히 바라지도 못해. 그저 그들을 만나서 용서를 빌고 뒤늦게나마 그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무엇이나 하나 해주고 싶은 생각뿐야. 그렇지 않고는 내 인생이 너무도 추악해. 이렇게 추악한 인생을 걸머진 채 죽을 수는 없어. 그래서 그러는 거야.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어.』
『……』
은실은 그저 고개를 떨어뜨린 채였다.
『미스·양?』
『네?』
『그애는 분명히 윤정아지?』
『……』
『그렇지? 윤정아지?』
『윤정아가 아니어요』
은실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겨우 대답하였다.
『아냐? 그럴리가 있나. 그럼 누구란 말야?』
『김정아여요.』
은실은 비로소 고개를 들어 윤 사장을 바라보았다.
『뭐? 김정아라구?』
『네. 김정아로 저는 지금까지 알아왔고 또 친해 왔어요.』
『흥 그렇군. 그렇다면 그애가 어머니의 성을 따랐구먼. 나 같은 아비야 아비 값에도 가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윤씨 성을 버리고 외가 성을 따른 모양이로군.』
『그렇지 않을 거에요.』
은실은 똑바로 윤 사장을 당돌하게 바라본다.
『그렇지 않다니?』
『입적을 할 수가 없었을 거에요. 그래서 외가 본적지에 입적을 한거래요.』
『알았어. 그럴거야. 그러니까 내가 골고루 그애와 그 애 어머니를 괴롭혀 준 셈이군. 그런데 그 애 어머니는 살아 계신가?』
『……』
『이건 나에게 매우 중대한 일야. 만일 정아 어머니가 죽었다면 나는 용서를 빌곳조차 없어지는 셈야. 그래서 나는 귀국하는 동안에도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기를 마음으로 얼마나 축원했는지 몰라. 물론 뻔뻔스러운 생각이지마는 이것이 지금의 내 진정야.』
『그 분은 살아계셔요』
은실은 잘라서 말했다.
『앙? 살아 있다구? 죽지 않았구먼. 나는 그동안 큰 전쟁을 겪어서 혹시 죽지나 않았을가 하고 매우 근심을 했어. 아니 으례 죽은 사람이려니 하고 다시 만나는 일은 단념하기를 여러번 했었어. 참으로 기쁜 소식이로군. 그러면 지금 어디 계신가?』
『그 분은 참으로 훌륭한 여인이셔요. 저는 몇번 그 분을 만나뵌 일이 있지마는 참으로 마음씨가 고으시고 이상이 높고 뛰어나신 분이 요.』
『그럴테지. 처녀 때도 그랬으니까. 그런 사람을 내가 배신을 했으니 참으로 못된 놈이었어. 모든 것은 그저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야. 그런데 그분은 지금도 혼자 사시나?』
『네?』
은실은 고개를 반짝 들어 윤 사장을 또 당돌하게 바라보았다.
『독신으로 지나시는지 그게 궁금해서…』
『그런 말씀 마세요.』
윤 사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금 노기를 띈 은실의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 분은 내리 독신으로 살고 계셔요. 주위의 유혹도 많았지만 모두 물리치고 깨끗하게 혼자 살아오신 거래요.
사장님 그러니까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만일 정아가 들으면 펄쩍 뛸거에요』
『미안해. 내가 실수를 했구먼. 그만 궁금해서 묻는다는 것이…』
윤 사장은 멋적게 웃었으나 감동하는 빛이 완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