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여름하기 학교] 필리핀을 다녀와서
만11세 아동의 종교·국가·정치·인종·언어 초월한 공동생활
의젓한 꼬마 大使(대사)로 행세
일본 어린이와의 미묘한 감정 대립 드러내
韓食(한식)대접코·춤·노래로 한국 소개
가난한 나라의 뜨거운 대접…분수 넘는 선물도
숙제물을 챙기느라 부산스럽던 어린것들로 내 마음조차 조급해지던 개학날이 지난지 두어 주일이 돼온다. 30여년을 두고 해마다 찾아오는 개학날이기에 올 따라 유별날 까닭이 없었는데 그토록 가슴이 두근거리던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새벽바람 속에 가을이 느껴졌고 그리고 전날까지 수선떨며 준비한 숙제물을 머리맡에 쌓아놓고 잠든 어린것들에게 새삼스레 눈길이 갔던 때문이었을까? 까맣게 그슬린 어린것들의 피부가 싸늘했다.
가을이 올때면 그 첫번의 찬바람으로 해서 얼마나 많이 마음 두근 되었던가? 지겹던 여름의 뜨거운 태양, 탁하게 흐려진 공기와 지친 사람들의 표정으로 권태롭던 날들이 그리움처럼 몰려오곤 했는데 나이가 들고 내 생활을 해가면서는 깨알같은 음력날자를 헤아려 보며 고추를 생각하고 새우젓을 걱정하고 여름옷 풀기를 빼고… 계절은 느낌으로 보다는 생활로 부터 다가오곤 했었다.
더위 핑계삼아 미루어둔 일들이 하나 둘 쌓이고, 찬바람 한번씩 내 곁을 스칠때 마다 또 하나의 할일로 가슴 뿌듯해지곤 했었는데…. 올 따라 더욱 강한 느낌으로 내게 오는 것은 아마도 일생을 통해 계절이란 것 그 變化라는 걸 맛보지 못하는 나라 남쪽의 필립핀을 다녀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變함없이 내리 쪼이는 태양, 어김없이 퍼붓는 한낮의 소나기, 축 처져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그곳에 비한다면 이 땅위엔 얼마나 많은 神의 祝福을 받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가 좀 더 긍정적인 태도로 우리의 것을 아끼지 않았던가? 그리고 숱하게 주어진 그 많은 축복에 대해 왜 일찌기 생각지 못했을까? 단 한달의 생활을 통해서 밖에는 보지 못했고 그나마 나의 무디디 무딘 필치와 적은紙面으로 한국가를 말한다는 게 얼마나 禮儀에 어긋나는 것인가를 모르지는 않지만 내가 보고 느낀 점을 몇가지 말하고 싶다.
「어린이국제여름마을」이란 1951년 美國의 아동심리학자인 도리스 티 알렌 여사가 큰 꿈을 안고 창안한 것으로서 만11세된 어린이들의 종교 국가·정치·인종·언어를 초월한 모임으로서 한달 동안 합숙을 하는 것이다.
이모임을 최초로 지도해 본 결과 교육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큰 효과를 거두었으므로 본부를 영국에 둔 이모임은 금년만 해도 18개 장소에서 同時에 「캠프」를 가졌었다고 한다. 그중 한 장소였던 필립핀으로 4명의 어린이를 데리고 떠났던 것이었다.
내 아이 넷을 데리고 하루를 돌고와도 피곤한데 더구나 각각 다른 환경과 生活에 젖어온 네 아이라는데 대한 책임으로 마음 무겁게 비행기에 올랐지만 필립핀에 도착한 순간 그것이 공연한 근심이었던 것을 깨달았다. 몇시간 전까지 엄마 옆에서 깜충대던 아이들이 어느새 의젓한 한국의 꼬마대사로서 행세하는 것이었다.
언어와 피부와 생활이 다른 그들은 그 어떤 것에도 구애 받음이 없이 즐겁게 뛰고 노는 것이었다. 「게임」을 하는데도 조금씩을 틀린 규칙은 새롭게 만들어 아무 불편없이 놀이를 계속했고 더구나 영어를 쓰지않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어린이들이 다른 나라 어린이들과 웃고 떠들고 즐기는 것을 볼 때는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마음 아팠던 일은 일본어린이들과 우리 어린이들 사이의 미묘한 감정대립이 C·I·S·V정신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 감정이 물론 일주일쯤 경과한 뒤엔 좀 멀어져가는 듯도 했지만 일본에 대한 우리 어린이들의 세심한 관심엔 변함이 없었다. 그런 것뿐이 아니었다. 네명의 어린이들이 어찌나 강하게 우리나라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지….
선물을 살 때였다. 고유의 공예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제, 미제의 상품만이 진열되어 있는 곳을 행여나 우리의 상품이 수출된 것이나 아닌가고 뒤지며 다닐 때라든가 하나의 물건을 고를 때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의논해 가는 것을 볼 때는 여간 마음 든든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土民들의 독특한 공예품만을 선물로 샀다.
7월 22일이었던가 보다. 그날 하루는 우리의 날로서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날이었다. 우리 어린이들은 모두 한복으로 치장하고 한국의 음식을 대접했고 또 춤과 노래와 무언극으로 우리나라를 소개 했었다. 우리 음식을 맛있게 먹는 외국 어린이들을 보며 또 우리 어린이들의 춤과 노래와 놀이를 즐기는 그들을 바라보며 조금이라도 우리 것을 소개할 수 있었고 알릴 수 있었던데 대해 자랑스러워하던 모습이 잊혀지질 않는다. 이러한 우리 어린이들의 뜨거운 애국심에 비해 우리나라에 대한 외국인의 인식은 그릇돼 있었고 또 지나치리만큼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지금도 그 한달을 생각노라면 잊혀지지 않는 황혼이 눈에 떠오르곤 한다.
한국의 가을하늘만큼이나 유명하다는 필립핀의 황혼, 바닷물 속에 가라앉으며 뻗어 오르는 주황빛의 황홀한 빛 속엔 금방이라도 바다의 여신이 나타날 듯 찬란했었다. 금발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도 그 황혼의 해변가에서 최초로 실감하였다. 하지만 그 찬란한 아름다움의 순간이 되기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무덥고 찌는 더위를 어디에 다비할 수가 있을까? 더구나 그 극심한 빈부의차는 우리의 것보다 심했으며 교통순경은 교통정리대신 식당이나 은행 학교와 같은 곳에 권총을 차고서있었고 시내 전화를 걸기 위해 6시간이나 매달려 있어도 결국은 걸지 못하고 말았던 일 또한 공예품을 除外한 모든 물건은 미제나 일제뿐인 곳. 결코 잘살지 못하는 나라. 그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베푼 대접은 정겹고 뜨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自己들 신분에 맞지 않는 지나친 후대, 가슴에 한아름씩 안겨주는 선물을 받고 돌아설 땐 고맙기도 했지만 좀 분수에어 긋나지 않는 가고 생각됐었다.
즉 그 호의가 고맙기도 했지만 그들 생활과 신분에 비해 과한듯해서 불쾌했노라고 여러 대표들의 말이었다.
문득 외국인에게라면 지나치리만큼 친절한 몇몇 우리나라사람들 생각이 나서 얼굴이 붉어졌었다.
친절과 호의가 절대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정도를 넘어 설때 자칫 잘 못하면 받는 쪽에선 감사 보다는 일종의 불쾌감을 갖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둘 만한 것이었다. 특히 우리나라 상인들 입에서 새어 나오는 일본말은 일본손님들에게 실없는 우월감이나 주게 되지는 않을는지 걱정이 되었다.
지나치게 태만하고 의욕이 없는 나라, 좋게 말한다면 여유있고 너그러울 수 있는 나라(이러한 여유와 너그러움은 현대의 문화병인 정신병이 적다는 통계로도 나오고 있다지만)가 필립핀이었다면 피상적인 관찰이라고 말할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연환경과 그 조건 속에서 그 보다 더 잘산다는 것도 힘든 일은 아닐까고 생각된다.
바람이 차겁고 하늘이 저토록 푸르고 높은 땅위에서 다시한번 이 땅위에서 설수 있는 神의 祝福에 감사한다.
김인자(西江大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