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영광 땅 위의 평화!』 너무도 고요하고 화평하고 겸허하고 사랑스럽고 또한 소박하게 내려진 그 축복의 밤은 얼마나 흐뭇한 즐거움에 싸여있었을까! 이제 부질없이 달뜨고 소란해진 무리 속에서 시달린 성탄을 다시 가정으로 가난한 농촌으로 그리고 도시로 맞아들이기 위해 이밤 고요한 대화의 모임을 마련한다. (편집실)
■ 모든 이를 招待하면서 / 金 플로리아노(慶大敎授)
兄弟들아 어둡던 한밤중서 이제 참된 즐거움을 나누자
天上의 즐거움이 한 村落에 接線되었으니
기다리던 聖誕節이 왔읍니다. 우리 民族, 우리 國民처럼 眞理의 降誕, 純粹와 貞潔의 來臨을 고대하기에 목말라 하는 民族이며 國民이 또 어디 있겠읍니까?이 땅의 백성들은 待臨節 속에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 救世主를 기다리며 살아왔읍니다. 참된 즐거움이 꼭 오리라고 믿고 살아왔읍니다.
그러면서도 그릇된 즐거움에 속고 살아온 것입니다.
『너희들은 언제나 주(主) 안에 즐거워 하라. 다시 말하노니 들거워하라. 너희의 溫順함이 모든 이들에게 알리어질지어다. 主는 가까이 계시나니라. 너희들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 慰勞의 말슴은 使徒 聖 「바오로」께서 獄中에 계시면서 걱정에 가득찬 自由民, 獄 밖에 사는 필립보人들에게 보내신 希望과 慰勞의 말씀이었읍니다. 獄中에서 암흑속에서 바깥 世界에 울려퍼진 소리었읍니다. 암흑에 싸인 이 한밤에 우리에게도 이 위로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眞情 즐거워할 것 뿐입니다. 참된 즐거움은 時間이 없읍니다. 期限이 없읍니다. 永遠히 끝이 없는 즐거움, 榮樂이니 이 즐거움 속에 우리는 「언제나」 젖어 있고 싶습니다.
우리는 政治家들의 約束을 걸고 그 實現을 苦待하며 즐거워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짧고 너무나 허무했읍니다. 순간의 즐거움이었읍니다. 많이 속았읍니다. 우리는 新聞이 報道하는 消息을 眞理로 믿고 슾러도 하고 즐거워도 했읍니다. 그러나 모든 「뉴스」는 新聞人들이 만든 것이었읍니다. 그 즐거움은 하루밖에 持續되지 않았읍니다.
다음날은 같은 新聞이 또 다른 걱정을 한아름 싸들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테레비」는 더욱 確實한 것으로 믿고 「내 눈으로 봤으니」 의심하지 않았읍니다. 참 즐거웠읍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도 사흘을 못채우고 製作者의 「카메라」의 作亂임을 알았읍니다. 마침내 술을 마시고 娼女의 알몸을 내 손으로 더듬으며 즐거움을 찾았읍니다.
이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苦痛과 虛無와 自處밖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읍니다.
참된 즐거움, 언제나 즐거운 生活은 「主안」에 밖에 없는 것입니다. 「主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만이 참된 즐거움입니다. 다른 모든 즐거움은 즐거움을 假裝한 自處의 世界입니다. 참된 즐거움은 즐거워지는 것이아니고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使徒 聖 바오로도 즐거워 하라고 命하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옳은 信者라고 하셨읍니다.
天上의 즐거움이 이 地上 「베틀레헴」 고을 보잘것 없는 村落한 地点을 찾아 고요한 이 한밤에 接線하여 天上과 地上의 즐거움의 對話를 始作했읍니다. 天國이 가까워 왔으니 우리는 즐거워해야 한느 것입니다. 소亂한 서울, 明洞 네거리는 오늘의 韓國 같읍니다. 數많은 兄弟들이 物質主義와 商業主義와 異端과 誤解 속에서 즐거움을 찾느라고 소란한 한밤을 지색우고 있읍니다. 즐거움을 찾는 우리 民族의 환상이올시다. 즐거움의 「할렐루야」는 「네온」도 騷音도 없는 「베틀레헴」 말구유 주변으로 옮겨갔는데도. 높은 志向을 가진 마음이 착한 兄弟들이여, 우리 다같이 모여 이 고요한 밤에 主안에서 天上의 즐거움을 나누는 이 즐거움의 향연에 積極 參與하여 고요한 對話를 나누사이다.
■ 한 詩人이 바란 성탄 / 金春洙(詩人)
異國情調 · 季節이 주는 韻致
고요히 家庭 분위기 에서
國民的 良識으로 좋은 「무드」 이뤄야
크리스마스가 全國民的 祝祭처럼 치분된 것은 이 땅에서는 아마 8·15 解放以後가 아닌가 한다. 물론 日帝 때에도 크리스마스 「무드」란 것이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무드」는 一部層에 局限되어 있었다.
解放以後 크리스마스 「무드」가 전국민에게로 波及된 데에는 충분한 理由가 있다. 解放과 함께 歐美의 風習들이 막기 어려운 巨大한 물결로 이 땅에 밀어닥쳤을 때 國民의 大部分은 좋건 궃건 거기 휩쓸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 「무드」란 것도 그런 것 중의 하나다.
季節로 보아 가장 「무드」를 助成하기에 알맞기도 하다. 年末 가까운 한겨울이자 여기에 눈까지 뿌리게 되면 어떤 서정的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휩싸이게도 된다.
이럴때 親한 벗들이 몇 어룰린다든가, 서로 좋아하는 젊은 남녀가 어울리게 되면 뭔가 조그마한 사건쯤 일어나게 마련이다. 더구나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하나의 先入觀이 있어 특히 젊은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즐거움이 적은 우리 生活에서 모처럼 하루저녁을 즐기려는 젊은이들의 그 心情을 微笑로써 감싸 줄 수도 있는 일이다.
多少間의 脫線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幅을 가진 社會의 雅量일 것이다. 더구나 親知들과 카드를 서로 나누고, 케이크나 앞에 놓고 家族끼리 閑淡이나 노래로 하루밤을 조용히 즐긴다는 것은 아름다운 風景일 수가 있다. 우리의 生活에서 이만정도의 극히 적은 즐거움마저 빼앗는다면 그건 이미 生活일 수가 없다. 이런 뜻으로는 基督敎人이건 非基督敎人이건 상관할 바가 없다. 조용한 祝祭日로 家族끼리 親知끼리 情을 나누며 즐길 수 있는 좋은 機會라고 할 것이다. 그런 점으로는 비단 「크리스마스 이브」만이 唯一한 저녁이 될 수는 없다. 4월 初8일도 祝祭日이 될 수가 있다. 傳統으로 보나 風習으로 보나 이날을 즐기는 것이 보다 自然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더욱 즐기고 있는 듯하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이미 말한 季節的인 影響도 作用하고 있겠지만 歐美人들의 그 開放的인 生活方式이 現代人에게는 韓國에서도 보다 迎合될 素地가 있어 四月初八日式의 祝祭 보다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더 歡迎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異國情調를 사람들은 더 좋아하는 傾向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도 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祝祭를 없애버릴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없앨 필요도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크리스마스 이브」의 「무드」를 하나의 「무드」로서 잘 가꾸고 키워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全的으로 國民全體의 良識과 審美眼의 成長에 달렸다고 생각된다.
具體的으로 말을 하면 이미 言及한대로 家族的 분위기 속에서 이 저녁을 조용한 즐거움으로 보낼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한다.
數3年 內로 차츰 이런 분위기가 社會 全體에 스며들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즐거움을 얻기 위한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려 즐거움을 깨는 그런 분위기로 젖어든다는 것은 어느모로 보나 슬기로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 主婦의 家庭에의 招待 / 金粉七(主婦 · 國民大 敎授 · 가톨릭여성협의회 사업부장)
즐겨 딥에 돌아올 수 있게
쓸쓸한 이웃 · 친지 등 초대
집안정리 · 성의있는 선물 · 음식 · 장식 마련코
해마다 맞이하는 성탄절이지만 항상 기쁨과 희망에 부풀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온 겨레에 빛과 기쁨을 주신 축복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기쁨을 가족과 친지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우리 주부들은 가족과 더불어 성탄절을 맞이하는 마음의 자세를 올바르게 가지도록 노력하여야겠다.
즐겁다는 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침체되거나 채못한채 내버린 문제가 있어서는 즐거울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신적인문제나 물질적인 문제 등을 성탄절까지는 해결하여 마음의 부담이 없어야 고요하고 조용한 성탄의 기쁨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탄을 앞두고 더욱더 가정이나 본당 그리고 사회에서 부지런히 선의의 해결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평신자로서도 여러가지 의무와 남과이 약속을 다할 수 있는 것도 성탄절의 크나큰 선물임을 알아야겠다.
둘째로는 성탄을 어떻게 지내느냐의 문제인데 가족 친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성의에 찬 선물 준비와 집안 정리 그리고 장식과 음식 준비 등이다. 이러한 일들은 주부에게 또 하나 기쁨과 보람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부들은 가족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으로 우선 집안을 깨끗이 하고 지성스럽게 장식하여 즐거운 분위기를 만든다.
선물은 평소에 가족의 성미에 맞는 것이나 필요한 것을 알아서 미리 하나 둘 사면 값싸고 좋은 것을 선택하여 살 수 있다. 그리고 성의가 중요하니 포장도 깨끗하고 예쁘게 하여 카드와 함께 준비하여 가족 모르게 깊숙히 보관하여 둔다.
이밤은 가족끼리도 좋지만 이웃이나 친지에 쓸쓸히 사시는 분이 있으면, 초대하여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도 뜻깊은 일이다. 그외에도 이 뜻을 기념하기 위하여 준비를 간소하게 하고 이웃을 돕는 것도 그 얼마나 성스러운 일이며 뜻깊은 일인지 모르겠다. 가족이 기꺼히 하게끔 주부의 선도 역할은 성심 성의의 결실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은 본당에서 지내는 가정미사에 참예하여 축복을 들이고 조용히 도아와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선물 두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25일 아침에 눈뜨자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서 선물을 발견한 어린 자녀들은 그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또 그뿐이랴 자녀들도 준비한 선물을 그 밑에 놓는다.
25일 아침 간단한 식사를 끝마친후 과일과 차를 나누며 선물들을 각자에게 나누어주고 그자리에서 각각 받은 선물을 풀어보이는 즐거움은 가족을 더욱더 기쁘고 화목하게 한다.
이러한 즐거움은 가족들로 하여금 외부에서의 뜻없는 불미스러운 행동을 막고 외출에서 여행에서 성탄을 맞기위해 기거히 짐에 돌아오게 하며 가족의 심신의 성장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금년은 돌보아야 할 일이 많다.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부드러운 천성을 발휘하여 가족을 돌보는 한편 우리의 따뜻한 손길이 아쉬운 형제들에게도 영광을 나누는데 노력하는 것이 진심으로 축복을 받는 뜻깊은 성타절이 될 것이다.
■ 벽촌의 公所에서 / 金茶斗(揷橋本堂 德山公所 會長)
어린이들 교리경시 · 노래 · 춤 나오면 어른들도 타령조의 성가 안부르고 못배겨
추렴한 떡 음식으로 잔치
내가 살고있는 곳은 성당에서 육 「킬로」나 떨어져 있는 시골로서 초가집이 아홉 평에 마루를 깔고 백여명의 교우들이 주일과 축일에 모여서 첨례를 보는 농촌의 공소이다.
우리 공소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저녁 아홉시가 되면 남녀 노소가 다함께 모여 「크리스마스 트리」와 제대에 촛불을 켜고 어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들의 교리 경쟁 시험으로 시작이 된다. 교우의 자녀와 예비자들이 빠짐없이 참석하여 모두 열심히 시험을 치르고 지켜본다. 춘추로 본당신부님이 전교 나오실때에는 성가와 교리를 가르쳐도 결석이 심하고 꾀를 부리던 아이들도 성탄 때만은 앞을 다투어 출석하고 열심히 배운다. 가난하고 초라하나마 상품에 매력을 느기는 원인도 있겠지만 크리스마스란 선물이나 카드가 없는 시골 아이드레게도 마냥 즐겁고 기쁨에 가슴 설레게 하는 날이다. 회장과 선생님이 채점을 하고 상본과 성물이 상으로 주어질 때 아이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어른들은 모두 산ㄴ타크로스 할아버지나 된듯이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
교리경쟁 시험이 끝아면 어른들이 보는 앞에서 성탄노래와 무용 소인극 등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박수와 과자로서 아이들을 기쁘게 하여주며 자성을 기다린다. 그러나 끝내는 선생님 회장 할머니 할아버지까지도 진양존 타령조의 성가라도 한마디 아니부르고는 못배겨나고 웃음으로 배꼽을 빼고야 만다.
자정이 되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성가로 시작하여 조용한 가운데 공소 예절이 시작된다. 사제와 미사가 없고 비록 가난하고 초라한 시골의 「크리스마스 이브」이지만 모든 이의 마음 속에 주님의 평화와 기쁨이 넘쳐옴을 느낀다.
조용하고 엄숙한 가운데 공소예절이 끝나면 교우가정에서 모은 쌀로 만든 떡을 남녀노소 한자리에 앉아 논아 먹으며 가난하나마 연중 가장 기쁘고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브」의 「피나레」를 장식한다.
수년전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크리스마스를 맞았을 때엔 교우들의 일부는 이십리가 넘는 성당으로 가고 나머지 아이들과 교우들은 제각기 집에 남아서 첨례를 보는지 안보는지 알 수도 없었으며 대부분의 교우들은 무의미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었다.
성당으로 간 교우들은 추운 성당밖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떨다가 자시 미사를 보고는 대부분의 교우와 아이들은 잘못이 없어 그밤으로 걸어서 집에 돌아와야 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시골과 농촌에 사는 교우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이브」란 무의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공로를 세우는 기회는 될지 모르겠으나 춥고 배고프고 고통스런 크리스마스가 되어 결코 기쁘고 즐거운 축일이 못됨을 알았다. 그리하여 다음 크리스마스부터는 모든 교우들이 다함게 즐기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축일을 보내기 위하여 우리 공소에서는 모든 교우들이 공소에 모여 전기한 바와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