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仰(신앙)과 殉教者像(순교자상)
수난의 悲劇性(비극성)에 信仰(신앙) 核心(핵심)둬
죽음의 공포·인간적 연민 욕구 등
비극적 人間像(인간상) 속에 殉敎者的(순교자적) 영상
藝術(예술) 通(통)한 적나나한 人間(인간) 觀察(관찰)
敎理(교리) 以前(이전)에 고뇌·투쟁 없는
「信仰(신앙)의 俗物(속물)」들을 신랄히 비난
이글을 쓰기전 그라함 그린은 가톨릭이면서 예술가라는 점을 더 강조해서 말할 必要가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作家 自身이 가톨릭으로서의 자기보다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人間의 드높은 사랑이 自己를 둘러싼 두터운 막을 뚫고 보다 더 넓은 他人의 世界로 뛰어들 듯이 그라함 그린의 그 성실한 예술에의 열망은 가톨릭이란 거대한 세계를 한걸음 넘어서게 되었다. 그는 선뿐만 아니라 악까지도 중요시할 줄 아는 작가임을 우리는 알아야 될 것 같다. 만약 그가 善만을 찬양하고 惡의 美를, 루치펠이 타락할때 불꽃처럼 빛나던 美를 배척했다면 그리고 단지 宗敎的인 가치성만을 부르짖었다면, 그라함 그린 自身도 말한 적이 있는 거와 같이 『그러한 경우 그는 삼류 哲學者 혹은 「아마츄어」 敎理先生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가톨릭을 통한 그를 보지 않고 예술을 통해서 그를 살펴 볼 때 우리는 가톨릭이 남긴 위대한 유산을 그의 作品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한번 「20世紀의 知的冒險」외 알베레스가 한말이 생각난다.
『…이들 기독교 作家들은 전혀 「義로운 사람」의 빛과 溫厚性과 그 환희를 그리지는 않는다. 義로운 사람이」 되도록 처음부터 정해져 있거나 지옥불에 타 죽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전진하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서로 상반되는 兩極에서 끌려 다니는 인간이 있을 따름이다. 그들이 그리는 人物은 敎化的인 인물이 아니고…』
여기서 우리는 그라함 그린의 文學的 위치를 엿볼수 있지 않을까? 가톨릭인 그는 魂의 문제에 대한 집요한 관찰을 할 수 있었고 선과 악 罪와 죽음에 대한 날카로운 감성과 비판력을 기를 수 있었을 것이다.
作品속에 나타난 그의 인물은 完全한 自由人이며, 그가 어디로 향해서 가고 있는 지도 모르면서 큰 도박과 같은 행위를 自由롭게 한다. 그는 때때로는 숭고해 보일 때도 있으나 대부분 악과 싸우느라고 신음하고 허덕이며 不倫에 빠지고마는, 너무나도 평범하며, 흔히 우리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인물 그리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스파이 密輸入者 살인자 주정뱀이 실패한 社會主義者, 못나고 나약한 女人…등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계율이나 敎會形式에 매달려 노예화된 바리세 敎徒를 고발했다. 그의 소설 「사건과 핵심」 속의 스코비의 부인루이스의 信仰이나 또 「권력과 영광」의 신부가 감옥에 들어가서 열심한 교도인척하며 다른 죄수들을 멸시하는 女信子를 면박해주는 장면은 바로 그라 함 그린이 敎會의 秩序위에 안이하게 만족하고 살아가는 속물들을 얼마나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위와 같은 그러한 점은 우리로 하여금 그라함 그린의 신앙의 본질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에 의한 기독교의 善이란 극히 역설적인 善이라고 볼 수 있다. 악이란 처음부터 存在하는 것이 아니고 善의 完全하고도 절대적인 빛때문에 自然的으로 생겨나는 그림자와도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完全性은 바로 「사탄」의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동시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의 善이 있는 곳에 사탄의 악이 따라 있음을 그는 역설했다. 그의 소설 「브라이톤의 바위」에서 위와 같은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악과 선은 화폐의 서로 다른 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가 말했듯이.
따라서 참다운 그리스도의 백성이란 항상 선과 악 그리스도와 사탄의 싸움장에서 살고 있으며 치열한 싸움이 끝없이 끝없이 계속되는 한 중간에 서서 그리스도를 찾아내고 그리스도의 뜻을 깨닫는 사람을 말한다. 이 전쟁이 치열하면 할수록 그 전쟁이 더욱더 성실함을 意味한다. 이러한 전쟁의 비극성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수난과 동일시하고 있어 그것은 곧 그라함 그린의 신앙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보다 수난의 비극을 따르는데 있는 것 같다.
그림의 作品중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수난당하는 그리스도의 영상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더 이점을 잘 이해할 것 같다.
「권력과 영광」의 위스키 신부나 「사건의 핵심」의 스코비는 바로 갈바리 산서십자가를 진 예수그리스도의 「이미지」로 창조된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作品들속의 인간들이 神을 모방해서 창조된 神의 影像이라면 자연 그 인물들 속에서 神도 마귀도 보여지고 있음이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좀 더 그의 信仰의 본질을 살펴보기 위해 그의 대표작 「권력과 영광」의 제3부의 31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 된다.
『그의 自信의 信仰의 한 중심에는 과연 그렇구나 하고 수긍이가는 신비가 있었다. 우리가 神의 「이미지」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신비- 神은 父母이기도하고 동시에 경찰관이고 범죄자이며 司祭요 광인이요 재판관이란 신비 神을 닮은 점이 교수가에서 늘어져 있기도 하고 감옥의 뜰안에서 총살을 당하기전 기묘하고도 이상야릇한 자세를 취한데서 혹은 性交를 하느라고 낙타모양으로 몸을 꾸부리는데 있기도 한다』 위와 같은 그라함 그린의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의 人間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그리는, 그리고 그가 애써 나타내려고 하는 殉敎者에 대한 어떤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주여 할 수 있다면 이잔을 거두소서』라고 예수께서 「젯세마니」 동산에서 부르짖은 귀절이나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의 귀절에서 그라함 그린은 그리스도 속의 人間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상의 죽음을 殉敎의 영상의 표본으로 삼았다. 그의 작품 「권력과 영광』에서 한 어머니가 아이들을 둘러앉히어 놓고 읽어주는 인간의 運命的인 悲劇性과 그 意義와 핵심을 벗어난 초자연적인 聖人傳과 殉教傅의 주인공을 그는 그가 그리려는 殉敎者로 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언제나 떨고 있으며 사생아를 가지며 그 사생아 즉 자기 딸에 대한 애절한 연민 속에서 고민하고 미사돈을 거두어서 도망하는데 필요한 여비를 삼으려고 했고 굶주림에 허덕이고 때문에 개가 빨던 뼈다귀를 빼앗아 뜯어먹는 위스키 신부의 죽음에서 또 「사건의 핵심」인 스코비의 자살 속에서 그의 순교의 이미지를 심으려 했던 것이다. 스코비의 자살을 어떤 意味로 보아서 그리스도의 자살이라는 것을 그는 암시해준다.
그는 그의 作品속에 神인 그리스도는 他人에 의해 살인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즉 그는 『그리스도는 자살했다』고 말했다. 敎會는 자살을 용서받을 수 없는 罪라고 했지만 때때로 神은 그 自身의 법칙들을 깨뜨린다고 말했다.
그는 스코비가 단순한 자살이란 것을 이유로 순교의 예를 영 둘러 씌운 것은 아니다. 자기 부인을 행복하게 해주는데 책임지겠다고 촛불을 밝힌 제단 앞에서 맹세한 神과의 서약을 지키지 못했다는 罪와, 간음의 罪, 또 이罪를 부인, 루이스에게 숨기기 위한 모령성체를 한 罪, 이모든 罪에 대한 일종의 보속으로, 그리고 그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리라는 사랑 때문에 스코비는 자살을 택한다.
마치 인간이 지은 수많은 罪에대 한 보속으로 또 인류에게 새로운 행복의 문을 열기위해 능히 도망할 수 있으면서도 십자가상의 죽음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그렇게도 타락했고 이미 信者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음을 자각한 그 신부에게, 그리고 자살을 행한 스코비에게 그 이외에도 다른 몇몇 주인공들에게 마지막 영광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즉 순교의 영광을 준 것은 바로 위스키 신부나 스코비나 그외의 인물들의 인간적인 비극과 타락을 통해서 얻은 겸손의 덕과, 인간과의 사랑을 통한 神에의 사랑이 곧 神의 은총을 끌어왔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 구원의 문이 되는 순교의 잔은 바로 神의 뜻에 의해서였지 人間의 意志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金慶男(大倫中高校 敎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