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宗敎觀(종교관)] ⑯ 宗敎人(종교인)이면 보다 修養(수양)된 人格(인격)기대
반발하던 어떤 神父(신부)의 印象(인상) 오래 남아
발행일1968-09-29 [제637호, 4면]
政敎와 邪敎의 區分은 예로부터 있었다. 그러나 定義는 時代와 主權이 바뀜에 따라 樣相의 變化가 오는 것임을 歷史 속에서 익혀 온 바다.
現在 우리나라에서는 몇몇 邪敎를 斷罪, 文敎部의 判決을 받아 法으로 嚴히 다스린다. 얼마전 某宗敎紙에 大書特筆하여 R·P長老敎派가 邪敎로 배척을 받아 指彈을 받은 것을 읽었다. 그러나 나는 基督敎의 敎義에는 問外漢 이기에 시비를 曰可曰否할 實力이 없다. 또한 時代사조에 의하여 正·邪가 전복되지 않으리라 確言도 못한다.
우리가정은 數代로 내려오면서 無宗教이다. 나는 어려서 가톨릭系 國民學校를 다녔다. 흰 고깔을 쓴 어지신 修女任들의 자상한 가르침에 동심에서도 仙女로 느꼈으며 修女任의 말씀에는 絕對服從하였다.
5學年때인가 未信者들 敎理班에 들라고 권유하시기에 서슴치 않고 들었다. 아담 이브 에덴동산의 善惡果로 失樂園에 떨어진 由來에서 始作, 카인과 아벨兄弟의 殺相·노아洪水 등등 나로서는 新知識에 陶醉되어 中間하던 成績이 꼴지로 밀려난 일이 있어 벼락같은 父母任의 꾸중을 들은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새삼스럽다. 어느 學期末 學父兄會가 있어 좀처럼 아니 生前처음으로 參席하신 아버지의 손 에 이끌려 校長室에 들어섰다. 금테안경에 黑色 神父服입은 40代의 K神父는 서로인사가 끝나자 教育方法運營 및 宗敎問題의 全般的인 것으로 對話를 이어간다.
그런데 校長神父와 우리 아버지는 마치 師弟之間과 같이 한편은 반말로 한편은 尊稱語로 말씀하시지 않는가? 童心에도 퍽으나 의아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를 世上에서 第一 어렵고 엄하시고 훌륭한 분이라 생각했는데 어리둥절하여 神父任과 아버지 눈치만 번갈아 살피다 나왔다. 그 당시 아버지도 麻浦區에 있는 國民校교감 時節이었다.
중이 施主하러와서 念佛을 하고 고맙다고 머리를 몇번이고 조아리고 가는 것을 往往본다. 佛蘭西의 어느 修道團體에서는 清貧 「모또」로 每日아침 乞食을 하며, 태국의 승려들도 家家戶戶 門前에 내다놓은 飮食으로 修行을 쌓는다고 들었다. 寡問한 탓이지만 이런 聖職者들의 모습을 想像해보았다. 고맙다는 인사말과 굽실거리는 그 形態를…
나의 銀行生治 2년중 窓口生活 15년에 各界各層의 顧客들과 接觸이 있었는데 다른 職場과는 異色的인 곳이 銀行이다. 現金을 주고받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言語行動에 있어 不順하면 당장 數百·千만원의 預金을 他銀行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설사 女使喚에게도 不親切은 고사하고 新紙弊를 要求하였을 時 없어서 古紙弊를 내놓았을 때는 그 會社 重役으로부터 電話로 불호령을 듣는다. 職業意識에서 散語을 쓰고 「留意하겠읍니다」하며 電話통에 머리를 꾸벅꾸벅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不完全한 人間으로 完成됨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人間의 修養은 人格과 直通한 것으로 배워온지라 職位高下를 論할 것은 없다. 이런 修養된 人間은 宗敎人이나 非宗敎人이나 區別할 必要가 없다. 그러나 宗敎人이라면 加一層 銘心해야되지 않겠는가? 他의 模範을 하라고는 强調할 수 없지만…
거리에서 2·3명씩 짝을 지어 거리를 걷는 修女任들을 볼 수 있다. 桃萊園의 仙女가 아니라 까마귀 중에 白로라고 하면 잘못된 表現일까?
道市近代化에 휩쓸려 長安 어느 곳에서도 바라보던 明洞聖堂의 十字塔이 안보이듯 흰 고깔 쓴 修女任들의 모습도 보이질 않으니 섭섭함을 금할 수 없다.
國民學校 담임修女任 校畏神父任과 우리아버지는 他界하시었다. 나를 가르치시던 修文님과 黑色의 校長神父任을 벌갈이 되새기며 겸양한 마음으로 良心을 내 마음에 간직하여 살아가는 것이 나와 나의 子息들에 대한 生活哲理이며 나의 宗敎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