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성직자, 수도자 및 신자여러분.
때마침 백여년전 병인박해시에 생명을 바쳐 신앙을 지키신 스물네분이 복자위에 오르실 시복식을 앞두고 순교선열들의 얼을 되새기는 복자성월을 보내면서 굳은 신앙생활의 자세를 갖추고 계실 줄 믿습니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지상대리자인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뜻 깊은 「신앙의 해」를 마치면서 「하느님 백성의 신경」을 반포하시어 신앙의 기본교리를 강조하셨고, 이어 「인간의 생명」이란 회칙을 내리심으로써 주기절제에 의한 조절외의 모든 직접적인 피임행위를 금지하심과 동시에 자연적이고 현세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이며 영원한 성격을 지닌 진정한 부부애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신성한 사명을 가르쳐 주셨읍니다. 이에 즈음하여 이미 「메시지」로써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해서 교황께 충성과 감사와 기원을 드린바 있는 우리주교단은 이제 친애하는 신자여러분에게 편벽되고 비판적이며 선동의 기미마저 느껴지는 일부 보도나 기사에 미혹되지 말고 우선 「신경」과 「회칙」을 정독하여 그 중심 사상과 내용을 깊이 통찰할 것을 당부하는 바이며 아울러 여러분이 지녀야 할 근본정신과 자세 및 여러분의 올바른 인식을 돕기 위하여 몇마디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1) 저간의 사정을 두루 살펴보건대,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계기로하여 우리교회에는 희망과 불안이 겹친 상황 속에서 실로 허다한 변혁이 일어났읍니다. 만고불후의 진리가 현대인에게 거북스러운 것이 되지 않고 보다 친숙하게 느껴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의 현대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각 방면으로 다대한 연구와 활동을시도해왔읍니다. 성서, 성사 또는 전례에 대한 활력에 넘친 연구가 그것이요, 인간 구원과 교회관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해석이 그것이요, 그리스도교적인 격에 입각한 종교생활의 고취가 그것이요, 사도직에 대한 열의와 사회참여에의 각성이 그것이며, 그리스 도교 재일치의 전개와 비그리스도교와의 이해증진 내지 협력이 그것입니다. 이같은 노력은 좋은 결실을 내어 우리 교회는 오늘날, 전에 없던 새로운 활력과 희망에 용솟음치고 있고 보다 큰 낙관주의에 층만해 있읍니다. 이는 전보다도 강생의 모든 결과를 깊이 파헤쳐 내려가는 데서 생긴 낙관주의, 다시 말하면 강생으로 말미암아 지상적 자연적 제 현실마저도 본질적인 진보와 개선을 이루게 된다는 신념에서 생긴 낙관주의입니다. 과연 천주께로부터 온 것은 모두가 선이요, 모든 것은 말씀의 강생으로 말미암아 용납되고 성화되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표어입니다. 이 새로운 사조는 「현세의 멸시」가 아니라 「현세의 성화」에로 향해 있습니다. 현세의 온갖 가 치있는 것을 이용하면서, 그리고 그것들을 그리스도교적 정신으로 채워가면서 종교생활을 영위해 간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은 판에 박힌 방법과 규정을 지양하고 자발성을 살리며 형식주의나 분석주의를 배격하고 그 대신에 주로 인격과 그 생명전체에 촛점을 두고 있읍니다. 실로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의식과 정신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일부에서의 무분별한 과열로 말미암아 부작용이 일어나서 어두운 회의와 불안의 먹구름 가톨릭교회의 하늘 한 구석에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부인할 수 없읍니다.
저 새로운 사조는 둔갑해서 현세 부정이란 낡은 사상에 대치하는 종교생활, 피조물의 이치에 맞고 인간적인 내용을 지닌 종교생활을 부르짖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규정이나 지시 또는 극기의 실행을 싫어하는 방향으로 많은 사람을 이끌고 있읍니다. 이것은 결국 자연주의적 사고방식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그로인하여 많은 믿는 이들의 마음에는 내용과 형식, 절대와 상대,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분별할 슬기가 흐려져 가고 있읍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본질적이요, 핵심적인 일부의 진리를 상대화하고 변질케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교회 안에 대두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에 당면하여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그리스도께 받은 명령을 따라 당신의 양심이 지시하는 대로 「하느님 백성의 신경」과 회칙 「인간의 생명」을 반포 하시게 된 것입니다. 당신이 가르치기로 명령받은 바로 그 진리, 즉 신앙과 윤리의 유산을 파괴할 권리가 교황께도 있을 수 없기에 그는 그것이 아무리 모질고 매정스럽게 여겨지더라도 진리로 확신하시는 바를 가르치실 사목적 책임이 있는 분입니다. 물론 그분은 당신의 결정이 현대에 인기가 없으며 다소 물의를 일으키고 일부학자들의 의욕을 좌절시키며 교회 내에 불타오르는 활기찬 노력과 낙관적 정열을 꺾는 듯한 느낌을 주리라는 것을 예견 하셨읍니다. 그리고 희망적 관망 속에서 산아조절에 관한 교회의 전통적 주장의 엄격성이 대폭 완화되기를 오랫동안 초조하게 기다리던 많은 부부들에게 괴로운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것을 통찰하고 계셨읍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리시기를 주저 하셨고 스스로의 책임감을 그토록 무섭게 느껴본 적은 일찌기 없었다고 솔직히 고백하신 것입니다.
(2)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교회의 사목적은 그리스도께 위임된 것으로서 신앙에 뿌리를 둔 애덕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교회에,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만민에게 보호의 혜택을 베푸시고 당신의 목자적 사람과 배려를 내리시는 그리스도 자신의 목자적 사랑의 사명이며 표시입니다(요한 10·11, 베드로 2·25, 5·2 이하). 그리스도께서 첫 교황인 베드로에게서 초자연적 신앙의 고백을 받으시고 당신과 당신교회에 대한 사랑의 서약을 세번씩이나 다짐받으신 후에야 비로소 그에게 사목의 대권을 맡겨주신 감격스럽고 뜻 깊은 장면을 상기할 때(마테오 16·13~19, 마르꼬 8·27~30, 루까 9·18~21, 요한 21·15~17), 이번 반포된 「신경」과 「회칙」의 의의가 더욱 명백해집니다. 오직 주께 대한 굳은 신앙심과 위대한 사랑만이 교황이나 주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백성들을 성실한 사랑으로 얼싸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교회의 사목직에 실제로 참여하는 사람이나 교회의 어느 구성원이나를 막론하고 교회의 법령과 지시를 하느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法度)의 빛에 비추어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 법도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아 구원된 모든 이에 대한 교회의 사랑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법규는 근본적으로는 모두가 사랑의 표현이며 주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열의의 산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의 자녀되는 사람은 무엇보다 충량한 순종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님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우리 주님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그 분의 교회를 사랑합시다.
천주님은 아버지로서 교회는 어머니로서 사랑합시다. 여러분이 천주님을 알아 공경하고, 그 이름을 전파하고 그 아드님을 알아 모시고 그가 당신 성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고백한다손 치더라도 만일 그 분의 교회를 욕되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그러므로 나의 가장 사랑하는 신자여러분! 한 마음 한 뜻으로 아버지 천주님과 어머니 교회에 다 같이 충실합시다』(시편 강화집·88)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의 나라를 넓히도록 그 왕국의 도래를 위해 능동적으로 노력하도록 불리운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대하여 어린이다운 사랑의 정신으로 뒷 받쳐질 때, 교회의 사목권에 대한 순종정신을 지닐때 비로소 우리는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3) 그러면 이제 우리는 교황님의 뜻을 받들어 장한 순교선열들의 피로 더욱 빛나게 된 우리의 신앙을 자부와 긍지로써 지켜나갈 사명을 깊이 자각해야 겠읍니다. 초자연적 생활, 즉 의화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 신앙은 『마음으로 믿어 위화될 것이요,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되리라』(로마 10·10)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자유의지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우리가 믿는 진리가 우리의 존재를 통째로 지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언행이 우리 안에서 일어난 전인적(全人的) 변화를 밖으로 드러내 보여야 하며 죽음에 직면해서도 우리의 신앙을 소리 높여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아뀌노」의 성토마스…로마서주해 10장).
하느님께 대하여 아무런 지식도 없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표방하는 우리들로부터 신앙에 대한 증거 제시를 요구할 완전한 권리가 있고, 우리는 그들에게 말이나 지식으로 만족을 줄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생활로써 증명해 줄 중대한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겠읍니다.(마테오 7·21 베드로 3·15)
이번 산아조절에 관한 회칙의 가르침이 자연법에 의한 것이라고 교황께서 재강조하신 만큼,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해서는 안됩니다. 순인간적 사고방식으로, 더구나 기분이나 감정으로 이 회칙을 대해서는 아니됩니다. 신앙을 떠난 인간적 이치로만 따진다면 우리의 순교선열들처럼 어리석은 인생을 보낸 사람이 또 어디 있겠읍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그것도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를 표준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추어볼때 인간 최대의 예지도 일말의 치우(痴愚)에 불과한 것입니다.
교황께서는 이미 공의회의 「사목헌장」에서 밝힌바 있는 부부애와 책임성 있는 부모로서의 사명수행을 강조하셨으며, 또한 경우에 따라서 자녀의 수를 결정할 수 있는 부모의 권리를 확인하셨읍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부부의 육체적 혹은 심리적 이유나, 또는 경제사정 따위 객관적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할 뿐아니라 신자부부는 하느님의 법에 의거한 양심으로 하느님 앞에서 결정지어야하며, 또 그 방법은 도덕률을 거스리지 않는 자제(自制)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선언하셨읍니다. 물론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희생, 실로 영웅적 희생이 전제되는 방법입니다.
현대인이 듣기 싫어하는 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자제라는 말일 것입니다. 자연계의 비밀을 골고루 파헤치고 그 위력을 제어 조정하는 재주를 가진 그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일에 매우 서툽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셍을 누리고 있는 이 세상에는 의지적 고행이나 극기를 인간 이성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멸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복음은 고행이나 극기나 심지어는 죽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들면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거기서 썩지 않으면 안된다든가(요한 12·24), 악을 행하게 하는, 또는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할, 기회가 되는 지체는 떼어버려야 한다는(마테오 5.29~30, 18·6~9, 마르꼬 9·42~48, 루까 17·1~2) 말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현실을 도외시한 「현세멸시」의 낡은 구호가 아니라 무한자에 흡수되기 위한 피조물 측의 필연적 이탈에 대한 교훈입니다. 저 옛날 군중이 예수님의 십자가아래 둘러서서 죽음의 엄숙한 순간을 맞이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서 곧 내려오기만 하면 너를 믿겠노라고 조롱했을 때, 그분은 당신의 신성(神性)을 버젓이 증명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기를 단연 거절하시고 죽고 마셨읍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종교생활의 실제면에 그리스도가 마치 왕이 그 옥좌에서 내려오듯이 십자가에서 썩 내려서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군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릅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없는 부활의 환희를 극기와 희생을 가르치지 않는 종교를 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교회의 교리나 생활윤리면에서 신화적 요소라든가 무지에서 나오는 부작용들을 가급적 제거 내지 억제해야 함은 물론이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세속화해야 된다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여 신앙의 내용과 천주님의 섭리를 모두 파헤치고 꿰뚫어서 인간적인 수준에로 격하시키거나 인간적인 틀에다 집어넣으려고 애쓰고 있지나 않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소위 인간적인 모든 것을 찬양하려는 현대인의 교만이 아닐수 없읍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는 인간은 비참한 허약성과 더불어 위대한 능력을 지니는 존재, 죄악에 빠졌으나, 수고수난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방된 존재, 하느님의 섭리를 따라 변모되어 완성의 고령(高嶺)에 도달해야 할 부르심을 받은 존재, 현세의 제약에 얽매였으나 내세를 바라보는 존재로서의 인간입니다.(사목헌장 2항) 따라서 우리에게는, 보호 육성해야 할 가치가 있고, 구현해야 할 초자연적 이상이 있고, 준수해야 할 도덕률이 있으며, 끊임없이 함양해야 할 성덕이 있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그리스도 신자의 이상은 높고, 그 가치 표준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이미 십계명판을 내던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벗어버린 사람들이 허다한 소위 일부 선진국에서는 필경 인간의 공허하고 무가치함을 절감하게 된 그들로 인해 해괴망측한 가지가지 사회양상이 노정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읍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하나의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일 가톨릭교회 자체가 그 신념을 잃고 세론에 영합한다면 우리의 세계는 얼마나 큰 혼돈과 공허, 무질서와 암흑에 잠기게 되겠읍니까? 한 나라는 산야와 하천 공장과 고속도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늘의 도리를 중히 여기고 순천(順天)할 줄 아는 건전한 사람들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지난날의 부모들이 순천하지 않았던들 다섯째 혹은 일곱째 혹은 열세번째 혹은 스물네번째로 태어난 프란치스꼬·라살, 성·끌레멘스 호프바우어, 성녀, 소화데레사, 「시에나」의 성녀 까타리나라든가, 정다산, 이율곡 이순신이라든가 또는 렘브란트, 바그너 슈베르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현과 위인이 혹시 이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현실과는 다른 역사를 가지며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잠재력을 우리 자신 안에 지니고 있읍니다. 이 잠재력은 우리의 건전한 판단과 비상한 용기에 의해서만 미래를 향해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전의 사정만을 타산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모름지기 긴 안목으로 인류역사가 의당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 사명수행에 힘을 기울여야 될 줄 압니다.
(4) 우리는 앞으로 그리스도 신자의 가정생활에 관한 문제 전체를 위해서 지상최고 목자의 보다 포괄적인 사목적 지도가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분의 분부대로 모두 다 빛나는 그리스도교 생활 안에서 마땅한 존경을 가지고 그 가르침을 받아들입시다.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우리 주교단은 오늘 여러분에게 사목 직책상 의당 일러드려야 할 이야기를 하였읍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그것이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음을 숨기지 않으렵니다. 또한 이 문제에 있어서는 이웃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일반 여론의 유혹적 영향이 가치 판단의 주관적 규범인 여러분 각 사람의 양심에 대단히 크게 작용할 수도 있으며, 인공피임을 이상화 하는 일상 대화를 통해서, 영화나 「텔레비젼」의 화면을 통해서, 일간 신문이나 정기 간행물 또는 대중문화 서적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치 관념이 쉽게 마비될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읍니다. 교회는 인간실존의 진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읍니다. 남 못지 않는 인간적 약점과 결함의 소유자였던 베드로 위에 세워졌던 교회가 아닙니까?또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를 어지신 어머니라고 일컫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여러분이 피부로 느끼시는 바와 같이 어머니다운 교회 안 에서는 준엄이 유화로 완화되고 법규가 건전한 자유에 도움이 되고 신앙과 이성은 알맞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여러분의 입장을 교회가 측은히 여김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품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의 양심이 어떠한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면 여러분의 사제를 찾아가 지도받으시기를 주저치말 것이며, 한편 사제는 누구나 사목 본연의 사명에 입각하여 각 사람의 양심을 존중하며 이해와 인내와 사랑으로써 형제자매들에게 위로와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래의 희망을 주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특히 많은 자녀를 두어 그 양육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계신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겠읍니다. 그러한 부모님들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마테오 18·5 마테오 9·37 루까 9·48)하신 스승의 말씀이나, 자녀를 세상에 내놓을 때마다 영생을 위한 공로가 되리라는(띠모테오 2·15) 사도 바오로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더욱깊이 신앙에 살기를 바라는 바 입니다.
끝으로 천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나라의 모든 가정을 축복하시옵고 순교선열의 피로 거름 주어진 이 땅에서 모든 이가 보다 열렬하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진리에 봉사할 수 있도록 천주께서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시읍기를 기원합니다.
1968년 9월 26일
한국천주교주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