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기 1866년 연초부터 전개된 이른바 병인박해(丙寅迫害)는 병인년 1년 동안에 한한 것이 아니라 병인년으로부터 6년간에 걸친 것이었다. 즉 그 박해의 주체적 인물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계에서 실각할 무렵까지 계속적인 천주교도학살이 벌어졌으며 그 가운데 수다한 교인들이 내려치는 박해자의 칼을 받고 천주대전에 혈제(血祭)로 올려져 순교의 영예(榮譽)를 얻었다.
순교자 수로 보아 우리 역사상 최대의 박해인 병인박해는 그 전개에 있어 네번에 걸친 커다란 기복(起伏)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방아책(防아策)을 싸고 교회와의 접촉을 기대하였던 대원군의 천주교접근이 그 자신의 정치적 생명의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라 하여 돌연 그 태도를 표변(豹變), 대박해령을 내려 천주교도를 마구 학살한 1886년 춘계(春季)의 제1차 파동, 프랑스함대의 강화도 점령인 병인양요(丙寅洋擾)로 격앙(激昻)된 병인 추동계(秋冬季)의 제2차 파동, 1868년 무도한 옵페르트의 덕산굴총사건(德山굴총事件)으로 통외자(通外者) 일소를 목적으로 한 제3차 파동, 그리고 1871년 미국함대의 강화도 공격인 신미양요(辛未洋擾)에 기인한 제4차 파동이 그것이며, 이렇게 네 차례에 걸쳐 격동하는 가운데, 8천여명의 순교자를 내었다.
우리 한국천주교회 사상 최대규모의 교난인 병인박해는 그 옛날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에도 비교할 수 있는 대규모의 박해였거니와, 1백년에 걸친 박해시대의 최후를 장식하는 대박해였다. 1784년에 출발을 본 한국 천주교회는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됨으로써 관변(官邊)에 의한 박해는 종식된다. 시간적으로 보아 병인박해는 이 박해시대의 최후를 고하는 최대 규모의 박해였다. 이후로는 집권자에 의한 박해 즉 국가적 박해는 없었다. 1901년 제주도교난사건(濟州島敎難事件)이 있어 교인 7백여명이 학살당하였으나 그것은 집권당국자에 의한 박해는 아니었다.
우리 교회사상 흔히 대박해라는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1866년의 병인박해 가운데 이미 기해박해와 병오박해의 순교자중 79위가 복자(福者) 시복(諡福)을 받았거니와 가장 최근의 박해이며 아홉분의 성직자와 8천여 순교자를 낸 병인박해의 순교자의 시복이 없어 기이한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이제 그분들이 순교하신지 1백여년 지나, 비록 24위라는 소수이기는 하나 시복을 보게 되었으니 후손 된 우리 교인들의 면목이 서게 되었다고 하겠다. 병인순교는 우리민족이 지닌 불굴 불후의 신앙심을 입증한 성전의 승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병인박해는 우리역사상 큰 의의를 지녔다.
(Ⅱ) 병인박해는 그간 서서히 동점(東漸)해 오던 서세(西勢)의 갑작스러운 조선 내도(朝鮮來到)와 얽히는 가운데 벌어진 살륙소동(殺戮騷動) 이었다. 즉 도도히 흐르는 세계사 조류가 마침내 우리 조선왕조에 밀려닥침으로서 야기된 사건이었다.
1860년 제정 러시아(帝政露西亞)가 연해주(沿海州)를 영유하여 우리나라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접경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러시아인들의 월경 남하사건이 빈발해짐으로써 흥선대원군과 천주교도와의 접촉이 생겨났다. 대원군은 방아(防아)의 필요에서 종래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사학도로 불려오던 천주교도와 대담한 접촉을 꾀했던 것이다. 시간의 천연과 불신의 의혹에서 결국 당시 한국천주교회 책임자인 주교들과의 직접대좌의 기회가 생겨나지 않았으나 ___ 이일로 쇄국의 권화(權化)처럼 불리우는 흥선대원군도 세계사의 흐름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결국 천주교도와의 이례적인 접촉은 뜻하지 않게 급전되어 천주교도 대학살극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무모한 대박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거듭 서세(西勢)와 충돌케되어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프랑스 선교사 학살의 문책을 이유로 군사력을 동원하여 통교(通交)를 모색해 온 프랑스 함대와의 충돌인 병인양요(丙寅洋擾)는 우리나라가 서구 열강의 공격을 받은 최초의 전투였다.
1866년 평양에서 벌어진 제네랄·샤민호 사건도 결국 서울에서의 박해사건에 자극된 평양시민들이 샤만호 선원의 폭행에 흥분되어 미국상선을 공격한 사건이었으며 그것이 원인이 되어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 양요를 계기로 다시금 박해가 강화되었으니 이 또한 세계사와 직결된 박해사건의 여파였다.
이렇게 볼때 병인박해가 일어나게된 원인이 세계사적 배경을 가진 것이었거니와 샤만호 사건 병인양요, 옵페르트의 만행, 신미양요 등 세계사와 직결된 사건으로 말미암아 병인박해가 더더욱 강화되었음을 볼때 쇄국 조선에 밀려닥친 세계사의 거센 조류를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단적 전제정치가 대원군은 세계사의 동태에 어두어 쇄국을 고집함으로써 세계사의 조류를 역행하였으니 바로 쇄국 조선의 비극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병인박해는 보다 넓은 국제적 시야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李元淳(史學家·서울大師大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