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 探訪記(탐방기)] 孫善智(손선지) 福者(복자)의 曾孫(증손) 孫金萬(손금만)씨
先祖(선조)의 代(대)를 이은 會長(회장) 10명·돈 없어 시복식엔 참석 못해
<복자성당에 遺物安置(유물안치)가 큰 希望(희망)>
유일한 遺物(유물)「致命記(치명기)」보관하고, 새族譜(족보)·門中契(문중계)도 만들어
『순교자의 집안에서 신부한명 안나오는 것이 정말 부끄럽습니다』 훤칠한 키와 도수 높은 안경을 낀 孫금만(45·비오)씨는 찾아간 기자에게 대뜸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 시복되는 24위 가운데 전주교구 출신 일곱분 중 孫베드로(善智)의 증손인 孫씨는 일찌기 성신대학 4학년때 가정사정으로 중퇴하고 그후 20여년간 교직에 종사하여 교감직위에까지 오른바 있다. 현재 전북 중등교육회 사무국장인 그는 본당인 전주전동 사도회선교부장 이기도하다. 치명하신 할아버지가 16세에 회장직을 맡았듯이 지금 孫씨 가문은 회장직위에 있는 분이 수두룩하며 시복자 孫회장을 위시해서 모두 10명이나 된다. 시복자 손 회장은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울면서 형장으로 따라 온 노모를 위로하고 빨리 다른 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사학대죄인(邪學大罪人)으로 국법에 의해 처형된 집안이 그 고을에서 끝내 편안할리 없으리라는 생각에서 였다. 순교하신 부친의 시체를 19세된 큰아들 정회(正會)가 밤을 이용해서 업어다가 다래실(현 완주군 비봉면 천호동)에 안장했으나 이웃의 눈총에 못이긴 유족들은 고향을 등지고 멀리 김제군 수류동(水流洞)으로 숨었다. 당시만 해도 첩첩산중이라 인적마저 드물었던 산골로 이사한 장자 정회는 자리가 안정되자 이 산골을 신자촌으로 만들고 회장직을 수행했다. 오늘날 이곳에 본당이 들어서게된 것은 순전히 초대회장인 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래실에 두고 온 부친을 자주 찾아뵈올 길이 없어 늘 고심했다. 그후 얼마안되어 다래실에 신자촌이 생기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부터는 공소(고산본당 비봉공소)가 생겨 지금도 이 순교자의 무덤을 비봉공소가 고이 관리하고 있다.
대원군이 죽고 열국과의 조약들이 체결되자, 드디어 이 땅에도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니, 순교자 집안인 孫씨가문도 비로소 영광스러운 선조의 죽음을 자랑하며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었다.
시복자 孫회장의 장손인 학진(學辰)의 독자덕노(德魯·요셉)씨가 생존한 최상위 후손으로 지금 이리(裡里)에서 역시 회장으로 있으며 그의 손자 중에서 수녀 한분(골롬바노·대구바오로회) 신학생(안드레아·寄永·대전신학교), 수사(眞永·서울·복자회)가 있다. 그리고 시복자의 큰아들인 정회의 둘째아들(다두·學順) 세째아들(바오로·學賢)의 후손 중에서도 수녀가 세분이다.
『그러고 보니 성직자가 안난다고 하시던 말이 사실과는 다르군요.』 기자의 반격에 孫씨는 덤덤히 말을 이어나간다.
『사실은 다섯명이나 신학교에 갔었지만, 모두 중도에서 실패했읍니다. 아마 성소가 없었나봅니다』
할아버지의 유물은 없느냐는 물음에 심히 안타까운 말을 들려준다.
시복자 孫회장의 유품으로 묵주와 「천주실의」가 있었는데, 지난 79위 시복무렵에 행적조사수속으로 「로마」에 가져간다기에 불란서로 보냈으나 항해하던 배가 조난되어 그만 분실되었단다. 그래서 지금은, 큰아들 정회가 기록한 「치명기」한권이 가보로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근래에 와서 孫씨가문은 시복자의 부친인 孫이냐시오(達元)를 시조(1代)로 하는 족보를 편찬했고 할아버지의 영광을 추모할 문중계(門中契)도 만들었다. 새 족보를 보면 6대에 걸쳐 40명의 후손이 있으나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다.
이들 후손들은 시복자가 치명한 12월 13일 곗날로 정하고 매년 한번씩 모여 장한 선조를 추모하고 친목도 도모하는데, 금년에는 10월 6일이 시복날이므로 10월 4일에 추석 잔치겸 성대한 잔치를 벌이고 돈이 없어 시복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섭섭함을 달랠 것이라 한다. 금만씨는 할아버지의 가장 큰 유물인 「두개골」을 전주 복자성당에 모시는 것이 후손들의 희망임을 강조했다. (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