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과 인간
『신앙이야말로 모든 것을 새로운 빛으로 밝혀주고 사람을 부르신 하느님의 의향을 완전히 드러내주며 따라서 참으로 인간적인 해결에로 정신을 이끌어준다』(사목헌장 11). 예수님은 신이 사람에게 대하여 무엇이냐를 먼저 가르침으로써 사람이 신앞에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다. 우리가 만일 『요한 세자의 세례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승천까지』(사도 1-22) 예수님의 선교행적을 살펴보면 그의 선교의 일관성을 파악하게 된다. 이것은 물론 과거에 선택된 민족에게 한번 실시한 것이며 동시에 세기를 통하여 이루어질 교리선교의 방법인 것이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르꼬 1-15)라고 선포히면서 그의 선교 전체의 대(大) 「테마」를 제시하셨다. 이 「테마」가 가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느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니 너희는 그에게 마주나가라, 하느님이 먼저 너희를 부르시니 너희는 그에게 대답하라, 혹은 하느님이 먼저 취하신 「이니시아티브」에 대해서 응답하라 등으로 해석된다. 즉 예수님은 신을, 대화의 「파트너」를 구하는 분으로 소개하시며 사람은 이에 응하여 그분 대화의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신과 대화하는 생활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일생을 통한 교훈과 행적은 말하자면 위에 제시한 「테마」에 대한 해설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를 우리는 복음에서 얻을 수 있는가! 여기 몇가지 비유 이야기를 들어본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테오 13-4의 9)로써 신이 먼저 사람안에 작용하심을 말씀하셨고, 보물과 진주의 비유(마테오 13-44·46)에서는 신의 부르심은 모든 것을 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따라갈 만큼 귀중한 것임을 가르치셨으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까 10-29 · 37)를 통해서는 현세에서 신과 대화의 생활을 함에 가장 중요한 방법인 사랑의 실천을 제기하셨다. 이 외에도 예수님의 모든 교훈과 행적은 신과 인간과의 대화적 관계를 촉진시키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신을 실존적 인간에게 호소하셨다는 점은 그 선교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사람한테서 멀리 있으면서 사람이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가까이 오지 않으면 불행을 내려주는 짓궃은 신이 아니고 우리에게 자진해서 가까이 오면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는 신(로마 5-8), 우리의 대답을 요구하는 신을 현대인에게 소개해야 하겠다. 이와같은 대화적 개방성에서만 신을 경험할 수 있는 희망이 아직 남아있다. 이 길만이 현대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 신을 찾도록 인도할 수 있으리라.
■ 인간과 인간
『만민을 아버지 같이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을 이 루고 서로 형제같은 마음으로 대하기를 원하셨다.』(사목헌장 24) 철학적 윤리에서는 인간과 인간관계에 관한 문제가 어떤 주체나 동일한 인간성을 소유함을 전제하고 그 관점에서만 다루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에서는 이 문제를 신의 개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해결짓는다. 여기서 극도의 분열상 밑에 허덕이는 현대인들의 허점을 메울 대안을 마련할 수 있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선포 방법을 가장 가깝게 그리고 가장 실질적으로 본따서 실천한 초대교회의 포교상황을 보면 하느님과의 대화적 생활이 그 목표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교리선교 방법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로 사람들에게 교리의 지식만을 전하지 않았고 가장 큰 비중을 생활교육에 두었다. 이 시대에 설립되었던 예비자 교육제도(CATECHUMENATUN)는 3년에 걸친 교육 기간을 가졌었는데 이 기간에 주로 사람들의 종교적 생활을 지도하면서 훈련시킨 것이다. 우리 생활 안에서 우리를 움직이는 신께 대한 대답은 생활로 드러내야 된다는 실증적 표현이 아닌가!
둘째로 교리도 충분히 가르치려 했으나 암기식으로 교육하지 않았다. 주로 성서를 해설하면서 신을 찬미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생활을 실습했다. 성서도 그저 해설한 것이 아니고 구세사적 관점과 게쳬에서 가르쳤다. 성 아우구스띠노가 그의 「무학자를 위한 교리서」에서 성경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시하신 것은 이 사실을 증거한다. 『첫기간에는 구세사 이야기를 전부해야 한다.』
세째로 이상과 같은 신앙의 생활교육은 전례를 통해서 그 목적을 달성했다. 이 시대의 교리선교는 전례와 혼연일치를 이루어 전례행사가 곧 교리선교였다. 유데아인들의 전통을 따라서 이어받은 말씀의 전례는 그것 자체가 교리의 교육이며 동시에 신께 바쳐지는 훌륭한 경신례가 된 것이다. 또한 전례행사는 성전안에서만의 행사가 아니었고 그것이 일상생활 안에 얽히고 설히어서 민중의 생리가 되고 말았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이 생활화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이 시대 신자들은 서로 사랑하여 그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알게 했었다. 그러나 교리 자체가 고유한 이론체계를 형성하면서 성경의 수위권이 상실되었고 교리선교는 지식전달로 변향(變向)하면서 교리교육과 신앙생활 지도를 엄격히 차이지우는 포교방법을 시행하는 현금에 있어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맺어주는 「에너지」도 줄어져가고 있다.
물론 초대교회의 포교방법을 그대로 전승해 내려오지 못하게 된데는 중세 이후에 교회가 내외로 겪은 역사적 사정들이 많이 작용했고 또 종교교육이 일반 교육학에 편승하여 교리선교는 계시내용의 선포임을 잠시 망각했었다는 사실도 그 큰 원인을 이루고 있지만 이에대한 상론은 지면관계로 여기서는 피한다.
다만 중세기에 철저하지 못했던 교리교육은 종교개혁자들이 크게 성공한 원인중에 하나가 된다는 사실만을 말해두고 싶다.
하여간 교리교육의 본연의 자세는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신앙이 생활화되어 인간과 인간을 「너」와 「나」로 묶어주는 강하고도 신비스런 힘이 신의 종교안에 내제한다는 사실이 현대인에게 과시되어야 하겠다. (계속)
이경우(신동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