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3) 古宮(고궁)의 뜰에서 ③
발행일1969-01-12 [제651호, 4면]
현주는 무엇보다 고맙게 생각했다. 그 전람회를 열기위해 미술부원들이 피나는 노력을 했었다. 학도호국단에서 충분한 예산을 책정해주지 않았다. 뿐 아니었다 .성공에 대한 것이라면 모를까 전혀 다른 방면의 활동이라 학교당국에서나 교수들도 뜨아한 편이었다. 미술부원들이 찻값을 털고, 용돈을 모아 부족한 화구(畵具)를 사서 융통해 쓰고, 화실이 없으므로 학교 교실을 겨우 빌려 밤을 새면서 그리기도 했다. 전람회 장소를 얻는 것만 해도 난관이었다.
미술이 전공인 학생들이라면 필요없는 일에 신경과 정력을 소모한 셈이었다.
그랬으나, 막 막을 올리고 보니 역시 반응이라고 전연 없었다. 반응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신문 문화면 같은데 회장의 사진 한장, 내주지 않는데는 우울을 지나 쾌씸한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평(評) 따위는 아예 기대하는게 바보였다는 심정이었다.
이런 전람회를 멀리 대구에서 물론 일부러 그걸 보러온 것은 아니겠으나) 와 보아주었고, 격려해 주고, 평까지 써보내 주었으니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현주는 미술부원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 하고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도 보아준 사람이 있다.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우리들의 노력이 노상무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현주의 기쁘고 고마운 마음이, 곧 편지 보내준 사람에게 회답을 내기로 했다.
어라후에 또 간결하나 정중한 편지가 왔다.
얼마뒤에 현주도 정성스럽게 회답을 보냈다.
잊으려고 할 무렵에 대구에서 편지가 왔다.
또 회답을 보냈다.
이렇게 편지가 오는대로 회답을 보내게 된 것은 처음부터 편지의 내용이 점잖고 자신의 사적인 것은 통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오직 공부와 그림 그리기에 정신하라는 당부만을 무겁게 해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렇더라도 편지의 내왕은 열번이 체 못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또 잊으려고 할무렵 서울에 가게됐으니 실례이지마는 잠깐 만나 보도록 해주었으면 어떨까… 그리고 오늘의 날자와 시간과 장소를 적어 보낸 것이었다.
처음에는 망서렸으나 만나보기로 한 것은 혹 장난꾼의 소행이라 하더라도 오랫만에 경회루를 본다는 생각에서였다. 현주는 경복궁에 들어가 경회루 앞 지정한 벤치에 낮았다.
『베레모를 쓰고 온다고 했지?』 편지에 지정해준 경회루 앞 벤치에 앉앗으나 아직 시간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대로 현주는 언제 보아도 새로운 것이 느껴지는 경회루를 갈아앉은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제 나타날 사람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가 마음 속을 짭짝하게 적시고 있었다.
『몇살이나 됐을까?』
그동안의 편지에 나이도 신분도 밝혀 있지 않았음을 다시 생각했다.
그것이 이 자리에 안자 있으려니 더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주 애숭이는 아닌 것 같고…』
역시 편지의 숙성한 문면이 기억에서 떠올라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중년?』
『그럴리야 없겠지!』
현주는 스스로 대답했다.
어느 중년신사가 자주인 것은 아니나 그렇게 충실하게 여대생에게 편지를 보내줄까?
『지금은 졸업해 어엿한 숙녀이지마는…』
현주는 빙그레 웃었다. 웃다가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경계심이 발동했다.
(중년이라면…야심을 가지고 편지를 보내곤 한게 아닐까?)
어떻든 경계심을 가지면서도 현주는 애서 덤덤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뭐 그동안 편지를 주고 받은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상대가 만나자고 해서 나온 것 뿐이니까…)
『현주씨죠?』
머리를 들어 쓴 사십이 되었을까 말까한 단정한 신사가 서 있었다.
『어머!』
현주는 저도 모르게 놀라는 목소리를 냈다. 눈이 둥그레지고 있었다. 지금 막 중년이면 어쩌랴 싶었던 생각이 그대로 들어 맞은데 대한 놀람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시죠?』
신사는 옆에 앉으면서
『오래 기다렸죠?』
목소리가 몹씨 유순했다. 대구에 산다고 하나 대구태생은 아닌듯 경상도 사투리가 아니었다.
그게 목소리와 더불어 안도감을 주었으나 얼굴이 첫인상으로는 잘생겼다고 할 수 없었다. 더구나 검정 베레를 쓴 중년신사란 현주는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어울리기나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베레를 쓴 대로 신사는
『실망했죠?』
담배갑을 꺼내 한대 뽑아 피우면서 물었다.
『아아니요.』
이건 인사치레라고 생각하면서도 현주는 그렇다고 아니요라는 말이 노상 인사치레인 것만도 아니라고 스스로 부정해 버렸다.
『그랬을 겁니다.』
『그건 왜요?』
『그렇게 나이먹은 사람이라고도 생각지 않았을거니까…』
『흐흐 훗』
현주는 웃었다. 신사는
『우습죠? 우스울 겁니다. 웃는 김에 더 웃겨드릴까요? 무더기로 말입니다.』
자신도 웃으면서 머리에 손을 올려 검정 베레를 벗었다. 대머리가 나타났다. 완전 대머리는 아니었으나 반월형이라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다지 보기 흉하게 벗겨진 것은 아니었다.
『대머리셨군요. 그래서…』
불쑥 현주는 입에서 말이 나가는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베렐 쓰셨군요 하자던 참이었지요?』
『호호홋』
『하하하』
신사도 따라 웃더니
『오해해선 안됩니다. 』
현주를 보았다.
『오해요?』
『이마팍이 벗겨졋다고 해서, 그게 창피해서 빵떡 모자를 쓰고 다닌다. 그러니까, 뭐랄까요? 자신의 약점, 자신의 추안 점을 감추고 남에게 좋게 보이려는 그런 얄팍한 심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아이참 누가 그렇게 생각한댔어요?』
현주는 경계해야 된다던 마음이 어느결에 풀어짐을 깨달았다. 그렇게 중년펜팔의 말은 푹은하고 재미가 있었다.
『한대도 무방하고 안한대도 난 아무 관계 없어요.』
『안 한다니까요.』
현주는 저도 모르게 눈을 흘길사했다.
『한해요? 정말?』
중년 펜팔은 미우던 담배꼬투리를 연못 안에 던지면서 현주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정말이에요.』
『역시, 내 점이 맞았군.』
중년 펜팔은 혼자말처럼 뇌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점?』
『예. 현주씬 자잘구레 사람의 입성이나 차임같은 걸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경솔한 성격이 아닐거라고 내 스스로 점을 쳐봤거든요. 그게 맞았다는 거예요.』
『 호 호 호』
현주는 이번엔 명랑하게 마음놓고 소리 높여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중년 펜팔은 짧게 말했다.
『습관이여요.』
『습관?』
『모자를 쓰지 않으면 외출한다는 기분이 안나는 습관…』
『그런 습관?』
『그런게 내게 있어요. 그런데 중절모는 너무 딱딱하고, 캡이라는 건 형사같은』
『그래서 베레 애용! 흐흐 이유가 수긍되고도 남음 있어요.』
이야기는 이런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동안 주고 받은 편지사연이나 거게 관련된거와는 동떨어진 화제가 오히려 현주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거닐까요? 저어리로…』
둘은 벤취에서 일어나 경회루를 천천히 돌았다. 별로 자잘구레 말을 주고받는 일 없이 경회루를 전면 후면 측면에서 조용히 감상하는 태도였다.
『선생님도 경회루를 좋아하시는 모양이죠?』
동쪽에서 경회루를 등지고 탑이 서있는 뜰로 가면서 현주가 물었다.
『무척.』
『그러세요? 저두.』
『하하, 그럴것 같애서 데이트 장소를 여기루 정했던거죠.』
중년펜팔은 싱긋 웃었다.
「데이트」라는 발음에 현주는 까닭없이 뜨끔해지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