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많지 않으면서도 할머니의 신덕은 불갈이 뜨거우셨읍니다. 우리는 아는 것 많아도 마음이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할머니, 천주께 목숨 바친 복녀 할머니! 우리는 오늘 당신의 신덕을 깊이 깊이 묵상해야 하겠읍니다』
이것은 昨年 9月 「가톨릭靑年」誌 첫페이지에, 할머니의 祈求 모습寫眞과 함께 그 아래 실려있었던 글이다.
나같이 믿음이 얕은者가 어찌 이같은 할머니의 뜨거운 信德을 바랄까마는 그래도 慾心은 있어서 나는 나대로 할머니의 信德을 헤아려본다. 할머니는 죽어서 萬物의 아버지이며 全知全能의 絶對者 天王께로 간다는 確固한 信仰이있었음이 分明하다. 곧 死後의 世界는 永生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수월한 問題일까? 나는 아무리 바둥거리며 생각해도(勿論 바둥거리며 생각한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이런 信德을 내 것으로 할만한 自信이 없다.
要는 死後의 世界 死後의 生活問題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은데 나는 할머니처럼 素朴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個人이건 民族이건 우리 人間生活에 가장 뿌리깊이 침투되어있는 問題, 그것이 바로 이 死後의 生活問題이고, 또 死後의 生活이란 觀念이 지금까지 人間의 모든 行爲와 思想을 指導해오고 있다는 것도 잘 알면서도 나는 그 침투가 實際로 어느 程度의 것인지 제대로 實感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聖바오로가 「아테네」에서 「에피크로스」나 「스토아」파의 哲學者들과 天主님에 대해 얘기할 때, 처음에는 이 古代哲學者들이 그런대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도 일단 얘기가 그리스도 復活에 미치자, 『어떤 자는 비웃고, 어떤 자는 이일에 대해서는 훗날 다시 듣기로 하자고 했다』(使徒行傳 17·32)한다.
이에 대해 텔토리아누스는 天主님은 기적을 可能케 하고, 復活이 生成보다 어려울 것이 없지 않으냐는 뜻으로 『만든 자는 고쳐만들 기도 한다』하고, 또 聖유스띠누스는 『너희들은 이 살덩이, 이뼈, 이 神經, 이 人間의 모든 實體를 본다.
그것을 만드는 데는 약간의 精液으로 足하다. 이런 것이 實現되기 以前부터 이러 일들을 斷言하는 者를 너희들은 믿었을 것인가?』라고 懷疑하는 者들을 일깨워 주고 있지만, 그래도 오늘날에 와서 이 問題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옛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天主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復活을 믿어왔고 또 현재에도 새로운 入敎者들이 믿으려하고 있는데 이것이 오늘의 合理主義思想으로는 到底히 理解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人間이 死後의 세계를 希求하는 태도만은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이다. 事實上 오랜 前史時代부터 이러한 希求는 人間生活속에 깊이 침투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인간이 죽음에 대해 反抗해 오고 있다는 證左이다. 이러한 反抗뒤에 숨어있는 人間의 希望이 本能과도 같은 希望이 窮極에 도달할 때 저 할머니의 뜨거운 神德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어떤 哲學者는 말하고 있다.
『不死에 대한 신앙도 나날이 更新되지 않으면 안된다. …死後의 生命은 이 世上 生存 中에 創造되는 것이며 세상에서 不死를 믿는 그 程度에 따라 人間은 실제로 不死가 되는 것이다』
金潤成(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