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宗敎觀(종교관)] ⑰ 自我靜觀(자아정관)이 곧 宗敎的(종교적) 入信(입신)?
어릴적 어머니의 迷信(미신)서 부터 宗敎意識(종교의식) 생겨
발행일1968-10-06 [제638호, 8면]
종교라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의 종교관 그리고 宗敎學이나 또는 그것과 비슷한 학문을 하는 사람도 아니요. 그것에 관계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도 아닌 사람의 종교관 그것이 뭐있을 것도 없겠지만 하여튼 늘어놓는다면 가관이리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나의 경우이다.
아직 국민학교에 가기도 전의 일이다. 더듬을 수 있는 나의 기억의 始原의 시절, 그것은 거의 동요의 세계와 분간이 가지 않을 때 이지만 나의 돌아가신 어머님은 봄가을 철따라 한번씩 고기와 떡의 소박한 음식을 가지고 날이 어두어질 무렵 뒷뫼에 다녀오시곤 하셨다.
그때면 의례히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새옷을 입으시던 일이 어렴풋이 머리에 떠오른다.
天地神明에게 무엇인가 기원하셨을 것이다. 그 무엇이 무엇인가는 새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 때 어머니의 평소와는 다른 조심스러워 하시는 태도에 나도 무엇인가 막연한 두려움이라고나 할까. 지금 말하라면 신성하고 경건한 마음이겠지만, 그런 것을 느꼈다. 이 두려움은 아마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된다. 나쁜 짓을 하여서는 아니된다.
등등으로 면모를 바꾸어 나의 마음의 생활을 지배했을 것이다. 하여튼 그랬던 것 같다. 나의 어머님에 대한 존경이라고 할까. 그보다는 사랑의 정이 남달리 강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인문이라고 일컬었던 한글을 깨우쳐 주셨고 셈과 한자를 가르쳐 주신 어머니였으니까.
위에 말한 마음이 아마 宗敎心 또는 신앙심일 것이다. 나에게 그것을 일깨워준 素材는 우리가 말하는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하더라도 그 소재가 두려움과 거룩함을 원시적으로나마 느끼게 하였다면 나는 그것을 宗敎라고 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미신과 종교의 엄밀한 구분을 잘 모른다. 물론 그 문화정도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는 알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거기에 절대적 尺度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나는 종교의 意義를 또는 이런 말을 종교에 관하여 쓸 수 있는지 잘 모르지만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경솔하게도 생각한다. 즉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 있어서 人類의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싸움을 하지 말아라.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아라 등등 소극적인 禁忌에서 비롯하여 어른을 공경해라. 이웃을 사랑을 해라 등등 적극적인 권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런 것 같다. 다만 종교에서는 그것을 확보하는 방법으로서 혹은 神의 존재를 내세우거나 극락세계를 상상케하는데 특색이 있지 않은가 한다.
그렇다면 나도 나대로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싶다. 절에 가면 부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성당에 들어서서는 또 제단을 향하여 눈을 감는다. 그것은 단순히 남이 신앙하는 종교니까 존중해준다는 뜻에서만은 아니요, 내 자신의 마음에 신성한 것을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나 자신은 나쁜 일을 하지말라, 좋은 일을 하여라라고 항상 내 자신에게 계명같이 일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 하느님의 힘에 대한 歸依心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良心에 의하여 강요된다는데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이 양심이 신과 직결되거나 또는 신 그자체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나는 나 자신을 믿는다라든가 나 자신이 神이다라는 식의 불손오만한 태도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다.
나라는 사람을 잘 모르고 나를 만나는 사람 중에는 가끔 무슨 종교를 믿느냐고 묻는 이가 적지 않게 있다.
왜요? 종교인 같은 냄새라도 납니까라고 물으면 대개 그렇다는 긍정을 한다. 참말이지 내가 나 자신을 靜觀하면 종교에 入信할 수 있는 심리적 경향이 대단히 농후하다고 자신한다. 다만 오랫동안의 무신앙의 생활이 선뜻 그 용기를 일으켜 주지 않아 방황할 뿐이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이해하는 종교의 意義만은 언제나 살려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종교란 인간의 내면생활에 관한 것이지, 外形같은 것에 굳이 구애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