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31) <第二話(제2화)> 榮光(영광)의 敗北(패북) ⑰
발행일1968-10-06 [제638호, 8면]
장을 보아 가지고 가던 늙은 부인은 대답을 하기 전에 윤 사장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정아 처녀 하고 어떻게 되는 분이신가요?』
그 부인은 도리어 이렇게 반문하였다.
『그럼 정아가 댁에 있기는 있구먼요.』
윤 사장은 그 대답만가지고도 만족한 마음이 비길 데 없었다. 그는 그 부인의 말만 듣고 이미 정아를 만난 듯이 마음이 밝아짐을 느꼈다.
『있지요. 벌써 몇해째 한지붕 밑에 살지만 똑똑하고 얌전하고 어디하나 나무랄데 없는 처녀이지요. 그란데 누구시기에 정아 처녀를 찾으시나요? 정아 처녀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니까 아버지는 아니실 텐데…』
『허허허허. 그럼 제가 누굴 것 같습니까?』
윤 사장은 너무도 기뻐서 껄껄 웃으며 농담까지 걸었다. 정아하고 몇해째 한지붕 밑에서 살았다는 말을 들으니 그 부인이 마치 무슨 가까운 친척이라도 되는 것처럼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글쎄요. 혹시 친척이 되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부인은 다시 눈을 찌그려 감고 윤 사장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모습이 순박하기도 하지만 마치 애들처럼 어리석어 보여 윤 사장은 또 한번 껄껄 웃었다.
『허허허허….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꼭 그 처녀를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 왔으니 빨리 가서 좀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러세요. 만나게 해드리고 말고 할거나 있나요. 가시면 금방 만나실 걸요.』
『지금 그 처녀가 집에 있을까요?』
윤 사장은 근심이 되어서 물었다.
『있을 거에요. 내가 시장에 가리고 나올 때까지도 집에 있었으니까요. 그 처녀는 밤에는 통 밖에 나가지 않아요.』
『누구는 밤에 나가나요?』
『나가기만요. 요새 처녀애들은 우리 젊었을 때와는 천양지간인 걸요. 나가서 자고 들어오는 것도 예사고요.』
부인은 혀를 끌끌차며 시장에서 산 김칫거리와 그밖에 물건들을 들어서 머리에 이고 조그만 보통이를 손에 들었다.
『그건 저를 주십시오. 어디 혼자서 그렇게 많이 들고 가시겠읍니까』
윤 사장은 조그만 보통이를 뺏어아들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합니까』
부인은 민망한 듯이 말했으나 속으로는 짐이 벅차던 차에 해롭지 않은 눈치였다. 부인은 앞서고 윤 사장은 그 뒤를 따라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갔다. 언덕위로 하늘이 넓게 가로놓였는데 그 하늘은 마침 보기에도 곱게 노을이 물들어있었다. 이미 저녁때가 닥아온 것이었다.
『여기서 댁이 멉니까?』
윤 사장은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왠걸요. 이 언덕길만 넘어가면 금방입니다.』
언덕길에는 윤 사장과 부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총총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사무용 가방을 들고 어떤 사람은 물건을 사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 보금자리를 찾아드는 날짐승들처럼 모두 자기 집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윤 사장은 그들과 나란히 걸어가며 갑자기 마음속에 슬픈 생각이 향불처럼 피어올랐다. 생각하면 너무도 오랫만에 자기의 가족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정아는 날마다 이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있었구나, 내가 「홍콩」으로 「싱가폴」로 분주히 돌아다닐 때 우리 정아는 이 언덕길을 고달프게 오르내리고 있었구나!)
이렇게 생각할때 윤 사장은 당장에 그 언덕길을 쓰다듬어 주고라도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아비로서 으례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샛길을 헤매고 있지 않았는가. 그러다가 이제 뒤늦게 정신이 들어서 돌아오니 너무도 때가 늦은 것이다.)
윤 사장은 마음에 벅차도록 회한의 정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정아야 미안하다 네가 이 못된 아비를 회피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너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오직 너에게 내가 이렇게 뒤늦게나마 할 수 있는 죄의 보속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다.)
윤 사장이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걸어가는데 앞서가던 부인이 걸음을 멈추고 머리에 인것을 또 내려놓았다.
『손님 죄송하지만 잠시 쉬어가야 하겠어요』 부인은 부끄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짐이 몹시 무겁습니까?』
윤 사장도 보퉁이를 놓고 이마의 땀을 씻으며 물었다.
『마침 김칫거리가 싸고 알맞은 것이 있어서 욕심을 좀 부렸더니 어찌나 무거운지 죽겠구먼요』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환갑이 몇해 안 남았읍니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는데 금년들어서 부쩍 늙고 지치는군요.』
부인도 이마의 땀을 씻었다.
『식구가 많으십니까?』
『대여섯 식구 됩니다.』
『이런 힘드는 일은 며누님이나 따님한테 시키시지 않고 손수하십니까?』
『그럼 팔자가 되면 오죽 좋겠읍니까. 남편이라는 것은 첩 얻어가지고 제 재미만 보다가 그나마 세상을 떠나고 큰아들은 작년에 월남에가서 전사했읍니다. 그러니까 며느리는 당장에 가버리더군요.』
『쯧쯧 그거 안되었읍니다 그려.』
윤 사장은 딱한 듯이 혀를 찼다. 그리고 윤 사장은 속으로 마음이 찔리는 것을 느꼈다.
『인제 가십시다. 정말 미안합니다.』
부인은 다시 짐을 이고 걷기 시작했다.
『부인 혹시 바깥어른이 살아 오셔서 지난 일을 뉘우고 빈다면 용서하시겠읍니까?』
뒤를 따르며 윤 사장은 불쑥 이런 말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