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24명의 새복자가 탄생하는 영광스러운 식전에 참석함과 아울러 영원의 도시 「로마」, 동경의 고장 「루르드」, 예수님의 발자취가 생생히 남아있는 「예루살렘」 등 구라파 각지를 여행한다는 기쁨을 감당하지 못해 간밤에는 잠을 설쳤다. 반수면 상태를 오락가락하면서 20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로마」에 도착하니 현지시간 4일 2시반이다. 「로마」까지 오는 도중 「홍콩」, 「방콕」, 「카라치」 세곳에서 잠간식 내려 바깥바람을 쏘일 수 있었다.
공항 휴게실에는 의례 간단한 쇼핑을 할 수 있는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사지도 않으면서 구경만은 열심히 해두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황대사 로똘리 대주교를 위시한 거의 전원이 그러했다. 가는 곳마다 일본상품들이 판을 치고 있었지만 자기 나라 특유의 생산품도 잊지 않고 진열해 놓았다.
「로마」의 「레오나르도·다·빈치」공항에 내리자 얼마전에 한국을 다녀간 교황청 포교성성의 콘웨이 몬시뇰이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이렇게 많은 한국 사람들이 몰려오니 우리 대사관에서도 한 사람쯤은 나오리라 예상했더니 그렇지가 아니했다. 어느 사람의 입에선지 욕설이 터져 나왔다. 『XXX들.』
호텔에 돌아와 각각 여행사에서 정해준 방에 여장을 풀었다. 시계를 보니 5시. 벌써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10월 4일
미리 짜여진 계획대로 온종일 관광을 다녔다.
「버스」세대에 분승하여 이태리 공인관광안내원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베니스」광장 「엠마누엘」전승기념비, 이태리대통령관저, 「캐피톨힐」「로마」대광장, 원형극장 등을 차례로 관람했다. 모든 것이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감명적인 것은 「로마」대광장이었다.
옛날 「로마」의 영웅 쥴리어스·시저가 심복이었던 부르터스 일파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는 원로원,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경탄을 아끼지 않으면서 눈에 익힌 거대한 광장과 층계, 많은 흰대리석 건물들을 곧 연상할 수 있는 잔해들이 즐비하게 버티고 서있다.
폐허가된 집터는 쓸쓸한 감을 주는 것이 보통인데 「로마」대광장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것은 「로마」에 무수히 흩어진 대부분의 유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베니스」광장 또한 퍽 인상적이었다. 수 없이 많은 「로마」시내의 다른 광장에 비해 겉으로는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광장이지 관광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서는 내가 역사의 고향에 와서 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러워진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이태리를 정복한 후 처음 「로마」시민들에게 얼굴을 내밀었다는 오죽쟎은 남쪽 건물 2층의 발코니, 금세기에 접어들어 이태리의 독재자 무쏠리니가 광장에 모인 「로마」 시민들을 열광케 했다는 역시 신통치 않은 서쪽건물의 2층 「발코니」 위에는 이태리의 3색 국기가 걸려 있었다.
「로마」에는 고층건물도 단층건물도 없는 것 같다. 거의 모든 건물들이 3층 내지 5층으로 되어있다. 또 각 건물들을 볼때마다 평소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지저분한 인상을 받는다.
도대체 산뜻하게 단장된 집이라고는 별로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가 얼룩이가 져있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안내하는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한다. 정 손을 대고 싶으면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거의 불가능이라는 것이다. 설명을 듣고 보니 고개가 크게 끄덕여 진다.
「로마」에 있는 한국 사람들의 친절은 눈물겨울 정도로 은근하다. 도착한 날 아침부터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찾아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순례단의 모든 시중을 잘도 들어준다. 특히 이곳 한국대사관에 영사로 있는 김학태씨와 이곳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준비하고 있는 임진창씨 두 사람은 거의 한시도 우리 일행을 떠나지 않으면서 대소간의 제반 일을 자진해서 처리해 준다.
趙炳雨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