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神秘家(신비가) 토마스 머턴 - 그의 生涯(생애)와 信仰(신앙)의 道程(도정) ㊤
로마교회 美術(미술) 通(통)해 信仰(신앙)에 눈떠
가톨릭文化(문화)에 감탄하며 일변 反撥(반발)
美國(미국)으로 가는 도중 一時(일시) 「코뮤니즘」에 취하기도
집요 · 성실한 신앙탐구 끝에 全生涯(전생애)를 神(신)께 바치려 결심
어릴땐 어머니로부터 종교교육 회피당해
미국 屈指의 著作家이며 「켄터키」 「제세마니」의 트라피스트회 修士神父였던 토마스 머턴이 東洋宗敎 연구차 「방콕」에 머물다가 53세의 길기로 졸지에 사망했다. 그는 行動主義와 持術主義가 난무하는 이 世紀의 와중에선 極히 稀貴하게 보는 명상적 神秘의 大家였다. 神의 光明 안에서의 自己發見 및 具現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完德에 도달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절감했던 그는, 조이스로부터 출발해서 마리땡 질송을 거쳐 복음성서에 이르기까지의 그 집요하고 誠實한 探究과정을 그의 유명한 自敍傳인 「七重의 山」에서 상세히 피력하고 있거니와 그 生涯 및 井神遍曆을 간추려 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토마스 머턴은 1915년 프랑스이 「쁘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 스콜틀란드系 「누벨 제랑드」 출신이었으나 어머니는 미국인이었다. 양친은 둘다 畵家였으며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는데 아버지는 성공회, 어머니는 웨이커교도였다.
그들은 자기 자식들의 精神이 그릇된 생각이나 범용 · 醜惡 · 虛僞로 더럽혀지지나 않을까하고 항상 心慮를 아끼지 않았지만, 어떤 종교적인 교육을 시키지는 않았다. 머턴의 어머니는 모든 종교는 知的 完成의 수준下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살때 할머니에게서 배운 천주경을 제외하고는 그가 종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어머니의 뜻을 쫓아 사람들의 무리를 追從하지 않는 精神의 自立과 獨創性, 그리고 明確한 性格과 自己流의 理想을 가져야 했으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고대 그리스영웅들의 가장 高邁한 行蹟들을 읽음으로써 스스로의 精神과 情緖를 키워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으로서는 광명과 암흑 · 평화와 갈등 · 질서와 혼란 · 애정과 죄 등의 相反된 충동을 민감하게 불러 일으키며 어느땐가 適用될 시기를 待期하고 있는 듯한 內部的 勢力을 어렴풋하게나마 거의 意志처럼 意識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고 아버지도 프랑스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자 머턴은 兄인 뽈과 함께 「뉴욕」에 있는 조부모댁에 가있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이국의 한 프로테스탄트 牧師로부터 「코린트」인들에게 보낸 성 바오로의 첫 서간경 풀이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慈悲를 고취하는 그 유명한 대목은 그렇듯 독창적인 설교자의 입을 통해 진실로 신기로운 意味의 色感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겨우 열다섯살이던 1930년에 마침내 그는 아버지마저 여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20세기의 古典的人間이 되어가고 있는 스스로를 自覺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미술에 잔뜩 沒入하여 1933년 방학을 이용해 이탈리아로 갔다. 이탈리아 미술에 열고아적으로 陶醉했던 것이다. 그는 마치 미술품에 굶주린 여행자처럼 로마로 가서는 「빠라땡」(천정) 아래 거의 廢墟가 되어있는 옛 교회당의 벽화들을 觀照하면서 처음으로 자기가 꿈꾸며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또하나의 「로마」에 흥미가 생겨남을 느꼈다.
순교자들의 추억을 담고 있는 교회당과 벽에 박혀있는 미술품들은 알고싶어 했으나 아직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未知의 언어로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날들을 보내면서 그는 하나의 精神的 危機를 體驗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가 愛好하던 작가는 어렴풋한 종교적 분위기를 가짐으로써 향기롭게까지 느껴지던 로렌스였지만, 어느 아침엔 그 작가의 중요한 걸작을 땅바닥에 동댕이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로마교회당의 벽화들을 보고는 신약성서를 읽고 싶은 욕망이 치밀어 오름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그것을 읽어내려갔는데, 그러면서 그는 역시 뜻하지 않았던 精神的動搖를 겪게된다. 마침내 어느 화사한 봄날, 그는 그렇듯 문득문득 다가드는 心的 동요로 놀라워진 마음으로 어쩐지 스스로를 刷新하는 하나의 수술이 곧 이어 이렁날 것 같은 찢어지는 듯한 가슴 아픔을 느끼면서 「아방땡」 광야를 오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언덕에는 도미니크회에서 봉헌한 성녀 사비나의 용장한 성당이 있었는데 그는 끌리는 듯 그리로 다가갔다.
그의 歸依의 정확한 시작은 바로 여기에서 일어난 事件에 결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때까진 성당에서 무릎을 꿇어본 적도 없었고 그 안에 現存하시는 神을 向해 기도하고픈 의향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성녀 사비나 성당에 들어선 순간 지금까지완 전혀 다른 하나의 變化가 일어났다. 문간에서 성수를 찍고 곧장 제단쪽으로 달려가서는 精誠을 모아 천주경을 암송했던 것이다. 새로 태어난듯한 激한 感動을 느끼며 밖으로 나왔을 때 그의 가슴엔 平和의 물결이 마구 술렁이며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지금까지의 자기 生을 바꾸어 보다더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摸索하기 시작했으며 그때로부터 神으로 향한 그의 정신편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리리라』한 약속의 말씀이 成就될 그런 순간이 그에게 到來했던 것이다.
며칠뒤 로마 「트라 퐁뗀느」의 트라피스트회를 방문했을 때 그는 두번째의 衝動을 느꼈다. 그의 精神 속에 서서히 탄생된 꿈은 『神은 내가 트라피스트회 수도사가 되면 기뻐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속에서 發해서 유열을 느기게만 했을뿐 아직은 이내 사라지는 性質의 것이었다.
얼마뒤 그는 至極한 鄕愁 속에서 長탄식을 하며 「로마」를 떠나 영국으로 갔다.
그리곤 「캠브릿지」대학에 등록햇는데 당시의 나인 18歲였다. 거기서 그는 단테로 향한 진정한 熱情의 각성을 느낀다. 그러나 다으해에 그는 다시 「캠브릿지」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거기서 미국으로 가는 긴 旅行을 하는 동안에 잠간이나마 「코 뮤니스트」가 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코뮤니즘」은 아직 턱수염도 나지 않은 19歲의 紅顔 만큼이나 성숙지 못한채 끝나버린 皮相的인 것에 불과했다.
「뉴욕」으로 돌아와 이번엔 「콜럼비아」 대학에 入籍하게 되는데 그때 그가 사랑하던 할아버지마저 別世한다.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기도하고픈 욕망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그 이후부터 그는 이제 철학학위논문을 쓰기위해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에띠엔느 질송의 「중세철학의 정신」을 손에 들게 됐는데, 가톨릭교회의 출판인준(NIHIL OBSTAT IMPTIMATUR)을 읽자 날카로운 비수로 가슴을 찌르는듯한 衝擊을 받았다. 그는 사실 가톨릭的 문화에 대해 대단한 讚嘆을 느끼고 있었지만 웬지 가톨릭교회는 항상 무섭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가치의 窓밖으로 마악 그 책을 던져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마구 들끓어 오르는 갈증 속에서 그것을 읽어내려가기 始作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