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五傷)의 신부로서 그렇게도 유명했던 이태리의 삐오 신부가 무수한 신화를 남진채 지난 9월 23일 「산·죠바니·로똔도」에 있는 「은총의 성모 까루친 수도원」에서 81세를 일기로 임종했다.
삐오 신부는 관절염과 혈액순환 장애, 기관지염 등으로 오래전부터 투병해 왔다. 삐오 신부가 성흔(聖痕)을 받게 된 것은 1918년 9월 20일 수도원 부속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직후 감사의 기도를 바칠 때였다.
그때 갑자기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한 삐오 신부는 처음에는 이같은 현상을 감추기도 했다. 수도원장의 지시대로 의학적인 치료를 했으나 상처를 자극할 뿐 지혈(止血)이 되지 않았고, 그 후 50년간 이 현상은 끈덕지게 계속되었다. 「우둔한 바보」로 놀림을 받던 어린시절, 삐오 신부는 그의 선생으로부터 『가서 밭이나 갈아라. 「피타고라스」 공부는 너 같은 부류가 할 것이 못 된다』는 소리까지 들었으나, 끈질기게 공부하여 마침내 사제직에의 꿈을 이룩, 1910년 8월 10일에 서품의 영광을 받았다.
이태리 신문들은 「빠드레·삐오 逝去」라는 제하로 1면 「톱」 기사를 장식했으며 10만명에 달하는 애도인파가 삐오 신부의 유해가 있는 수도원으로 몰려 교통이 완전 두절되는 사태를 빚어냈다.
삐오 신부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벨레그리노 수사는 23일 새벽에 일어난 일을 이렇게 얘기했다.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난 삐오 신부는 나에게 「지금이 몇시냐」고 묻고, 나의 대답도 듣기 전에 「꼭두새벽이야·잠이 올것 같지 않는데」하며 성무일과를 읽기 시작하다가 그는 「몸이 좋지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금 있다가 그는 「오늘 아침미사를 드렸느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드리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그러면, 지금이 나를 위해 미사를 드려줄 때이다」고 말했다. 이 말을 마치자 마자 삐오 신부는 바퀴 의자에서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삐오 신부는 이미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며 의사의 주선으로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 순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가 새벽 2시 30분-…★
【NC-編輯室】
【前略】
삐오 신부는 그의 수도원으로 하루에도 수십명씩 때로는 수백명씩 몰려오는 순례객들을 그의 성실한 인간애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병자용 의자에 부축 받으면서 항상 부드러운 손길로 그들을 맞아들였다.
삐오 신부는 이미 온 세상에 너무나 잘 알려진 분이며 어떤 이는 20세기의 가장 많은 화제를 가진 수도자라고까지 평한다.
세계도처에서 신자이건 아니건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인품과 성덕에 끌려 그를 만나러 모여들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며 이미 우리나라에도 어느 정도 잘 알려졌고, 그를 직접 만난 사람도 더러 있다. 그는 자선의 아버지였다. 많은 독지가들로부터 그의 덕망에 맡겨진 수십억의 돈이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는 이들을 위하여 쓰여졌다. 그의 정신은 어느 환경이나 처지에 따름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항구하였다.
그 별세하기 바로전날 밤이었다. 어느 익명의 희사자가 삐오 신부의 건강회복에 도움이 될가해서 좋은 음식을 수도원 문전에 두고 갔다. 그러나 그의 인정은 그것마저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게끔 했다.
「갈가노」 산비탈에 자리잡은 그 빈촌에 삐오 신부의 병환이 점점 악화되고 중태에 있다는 소문이 퍼질 때마다 그를 추모하는 그곳 사람들은 그리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그마한 우체국에는 매일 끊일새 없이 수백장의 문병과 영적 선물의 내용이 적힌 전보가 각처에서 날라오는 가하면, 미국·극동·아프리카·오스트렐리아 등 멀리서 그를 추모하는 자들로 조직된 「기도희」의 작은 간행물은 그의 위독을 전하고 그를 위한 기도를 청하는 보도를 실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를 추모하는 많은 이들의 성원과 기대와는 달리 그의 임종의 소식이 전해지고 말았다. 이제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오상을 몸에 받은 수도자 삐오 신부에 대한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교회당국의 판단만이 남았다. 그러기에는 먼저 침착한 시간이 필요하다.
교회는 그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오상의 초자연성 여부에 대해서 아무런 평가도 하려하지 않았다. 이제 그 판단은 수년이 걸릴지 수십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현 교황 바오로 6세가 표시한 특별한 관심과 개인적인 존경으로 보아 어떤 이는 교회당국의 판단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도 있다. 바오로 6세가 아직 「밀라노」 대주교로 있을 때 삐오 신부의 사제서품 50주년을 경축하는 서신을 직접 보내기도 했고 작년만 해도 그의 수도허원 60주년 기념일에 그에게 교황강복을 그곳에서 대행해서 줄 수 있는 특전을 부여하였다. 흔히 사람들은 오상은 초자연적 은사라고 하지만 그것은 교회당국이 때가 오면 분명한 판단을 해 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삐오 신부는 무수한 영혼을 위안해주고, 주님의 품안으로 귀화시켰으며, 신앙과 그리스도교적 생활에서 먼 사람들과 종교를 반대하거나 때로는 핍박하는 사람들까지도 하느님과 화해시켰다는 사실이다. 한말로 그의 고해소는 자비와 정의의 법정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고해소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더러 그는 어떤 이에게 따라서는 사죄경을 보류했으며 사죄경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다시 그에게 돌아와서 죄를 진정으로 통회 고백하여 마음의 평안을 되찾을 때까지 불안해서 못견딜 정도였다고 하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영적재생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어느 정도 확실한 통계인지 모르지만 고백의 성사를 받은 자는 최소한 50만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숫자에 있지 않고 그가 사람들에게 보여준 인품과 덕성의 감화력이다.
그의 인상은 소박하며 덥수룩한 수염의 얼굴에다 때로는 미소하는 듯 때로는 근심하는 듯한 눈을 가졌다. 그러나 항상 방문객의 양심 속을 파헤쳐 무엇인가를 찾아 낼려는 듯한 예리한 눈초리엔 누구든지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한다. 또한 그의 담화에는 맑은 물이 조용히 흐르는 듯한 낭낭한 말씨를 지녔으며 선종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고 많은 사람의 혼을 빼앗을 듯한 어떤 매력을 주었다고 한다. 그의 몸짓은 언제나 촌스럽고 애교가 없다고 할 정도로 거칠은 편이었다. 특히 그는 자기 출신과 비슷한 소박한 촌사람들과도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듯 털어놓고 이야기할 줄 알았다.
삐오 신부는 이태리 동남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노동을 하면서 가난과 언제나 시달려야하는 품팔이 농부의 집안에서 1887년 5월 25일에 태어났었다. 그의 아버지는 「베네벤또」 지방의 「삐에뜨랄치나」라는 가난한 촌락의 일자무식꾼이며 가난한 농부였다. 삐오 신부에 관한 일화는 많다. 한번은 어떤 청년을 보자 『어이 여보게』하고 불렀다. 그 청년이 어리둥절 하자, 『거기 서있는 자네 말일세』하고 지적하며 『자네 속옷이 꾀 지저분하군. 아나 모르나?』하고 그 청년이 당황할 정도로 혈문하였다. 돌연한 질문에 자기 속옷을 이리저리 살피던 청년은 『깨끗한데요?』라고 대답했다. 삐오 신부는 빙긋 웃으며 다시 한마디 던지길 『그 속옷말고 그 속옷에 있는 것 말일세』라고 하자 그제사 그 청년은 눈칠채고 고백의 성사를 볼려고 따라 갔다고 한다. 그의 전생활에서 신앙하는 사제의 모습을 볼수 있다. 그가 집전하는 아침미사에 참례하려면 날이 새기전에 일어나서 「산죠봔니·로똔도」를 올라가야만 항상 시계처럼 정확한 새벽 5시반 미사에 참예할 수 있다.
그와 같은 경건한 열성은, 어릴때부터, 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15세 어린나이에 엄격한 까뿌친회의 규율을 준수하고 수도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때와 조금도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신앙이 혼돈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의 죽음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지난 9월 20일 즉 선종하기 3일전은 그가 그의 몸에 계속적으로 뚜렷이 볼 수 있는 오상을 받은지 만50년 되는 날이었음은 우리를 더 궁금하게 하여준다.
鄭銀圭